들어는 봤나, 각본집 덕질?
들어는 봤나, 각본집 덕질?
  • 이예빈 기자
  • 승인 2022.08.29
  • 호수 1551
  • 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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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요……완전히 붕괴됐어요.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이 대사는 지난 6월 개봉해 N차 관람 열풍을 이끌며 흥행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 속 대사다. 이때 흥행한 것은 영화뿐만이 아니다. 영화의 각본집 역시 지난 5일에 출간되자마자 종합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이처럼 일명 ‘각본집 열풍’은 해당 영화뿐 아니라 △드라마 「나의 아저씨」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영화 「기생충」 △영화 「동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요즘 덕질하는 방법, ‘각본 덕질’
각본집이란 드라마나 영화를 만들기 위해 작성한 글을 모아둔 것으로, 주인공의 움직임이나 카메라의 시선 등이 자세히 적혀 있다. 원래 영화 마니아들만 소비했던 각본집은 지난 2016년에 개봉한 영화 「아가씨」의 흥행을 계기로 처음 대중화됐다. 해당 작품의 팬들이 각본집 제작을 적극적으로 요구하자, 하나의 콘텐츠 소비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이다. 박형욱 <예스24> 도서 PD는 “드라마나 영화 작품을 여러번 보는 마니아층의 적극적인 관람 태도가 구매 열풍으로 이어진 것”이라 설명했다. 이런 각본집의 대중적 인기는 이례적인 현상이다. 박숙경<예스24 마케팅본부 뉴미디어팀> 과장은 “각본집은 구매 대상이 원작의 관객으로 한정되기 때문에 종합베스트셀러 순위권에 오르기 어렵다”며 “그런데도 지난 2020년부터 다양한 각본집이 꾸준히 상위권에 올랐다”고 분석했다. 이렇듯 각본집은 좋아하는 작품을 향유하는 ‘덕질’의 한 방법으로 부상했다.

작가와 감독의 의도 파악하기
각본집은 인물의 행동이나 심리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어 독자가 감독과 작가의 의도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돕는다. 작품 감상 후 보다 구체적으로 장면을 이해하고 싶은 관람객에게 안내 책자가 돼주고 있는 것이다. 조유빈<중앙대 에너지 시스템공학부 21> 씨는 “각본집엔 감독과 작가가 관객이 무엇에 집중하길 바라는지 드러난다”며 “실제로 영화 「헤어질 결심」 속 ‘홍산오’란 캐릭터의 등장 이유를 이해 하지 못해 당황스러웠는데, 각본집을 읽은 후 어떤 연출을 목적으로 등장한 인물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 영화 「헤어질 결심」 각본집 중 영화에선 볼 수 없는 대사 부분이다.
▲ 영화 「헤어질 결심」 각본집 중 영화에선 볼 수 없는 대사 부분이다.

학습 도구로 활용하기
한편 각본집은 영상 관련 진로를 희망하는 사람부터 단순한 영화 팬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교재가 되기도 한다. 특히 각본집은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기 전에도 영상계열 학과에선 연출이나 촬영 기법을 배울 목적으로 활용돼왔다. 박시원<예체대 연극영화학과 21> 씨는 “각본집을 통해 글로 된 내용이 작품에 어떻게 반영됐는지를 비교하면서 감독의 장면 구성 방법과 촬영 기법 등을 공부한다”며 “최근엔 영화 「버닝」을 본 뒤 스스로 상상해서 써본 시나리오와 각본집 속 실제 시나리오를 비교해 부족한 점을 파악하는 연습을 했다”고 말했다.
 

▲ 영화 「벌새」 각본집의 앨리슨 벡델과 감독 대담 부분이다.
▲ 영화 「벌새」 각본집의 앨리슨 벡델과 감독 대담 부분이다.

다채로운 콘텐츠
최근엔 각본집을 통해 제작 과정에서 편집된 대사나 장면뿐만 아니라, △감독과 작가 대담 △스토리보드(줄거리를 그림이나 사진으로 정리한 것) △스틸컷(작품 속 장면 사진) △평론 △후기까지도 볼 수 있다. 이처럼 새로운 콘텐츠가 추가되면서 각본집은 점차 소장하고 싶은 기념품으로 인식되고 있다. 박 PD는 “활자 위주로만 구성된 기존의 각본집과 달리, 요즘엔 팬들의 소장 욕구를 자극하도록 만드는 추세”라 설명했다. 영화 「벌새」 각본집을 좋아한다는 박 씨는 “탄탄한 여성 서사로 유명한 작품인 만큼, 각본집에 벡델 테스트 창시자 앨리슨 벡델 작가와 김보라 감독의 대담이 실려있다”며 “동경하는 감독과 유명 작가의 진솔한 대화를 읽을 수 있어 좋았다”고 전했다. 조성주<예체대 연극영화 학과 18> 씨 또한 “드라마 「D.P.」 각본집엔 작가가 각본을 쓰며 들었던 노래가 소개된다”며 “그 노래를 들으며 작가가 느꼈을 기분을 간접 체험할 수 있어 좋다”고 전했다.

출판계도 환영하는 각본집
각본집의 흥행은 출판업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출판업계에선 각본집이 하나의 출판 장르로 자리 잡아, 꾸준한 인기를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원호<을유문화사 편집부> 과장은 “각본집의 경우 평소 책을 즐겨 읽지 않는 사람도 언제든 고객으로 만들 수 있는 데다, 화제가 된 작품만 골라 출간하기 때문에 흥행도 어느정도 보장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이런 특징 덕분에 각본집은 앞으로도 출판계 안팎에서 꾸준한 인기를 얻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분석했다.

이렇듯 각본집을 읽는 건 단순히 서사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다. 여기서 나아가 작품을 깊이 있게 음미하는 하나의 덕질 방법으로 자리 잡고 있다. 만약 각본집 덕질을 모른다면, 이번 기회에 소장하고 싶을 만큼 좋아하는 작품의 각본집을 읽으며 나만의 방식으로 즐겨보는 건 어떨까.


도움: 박숙경<예스24 뉴미디어팀> 과장
박형욱<예스24> 도서 PD
최원호<을유문화사 편집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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