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고라] 괜찮아, 사랑이야
[아고라] 괜찮아, 사랑이야
  • 정다경<사진미디어부> 정기자
  • 승인 2022.06.07
  • 호수 1550
  • 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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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경<사진미디어부> 정기자

“이 낙타 그림이 뭔지 알아? 사막에 사는 유목민들이 밤에 낙타를 나무에 묶어둔 모습이야. 그런데 아침에 끈을 풀어, 보다시피. 그래도 낙타는 도망가지 않아. 나무에 끈이 묶인 밤을 기억하거든. 우리가 지난 상처를 기억하듯. 과거의 상처가, 트라우마가 현재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는 얘기지.”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어릴 적 트라우마로 인해 화장실에서만 잘 수 있는 남자 주인공이 화장실 벽에 걸려있는 낙타 그림을 보면서 한 말이다.

필자는 낙타 그림을 보고 ‘나도 낙타였구나’하고 동질감이 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끈에 묶인 채 목요일 밤을 기억하는 낙타. 낙타는 아침이 돼도 도망가지 않았다. 어느덧 1년 6개월의 수많은 낮과 밤을 거쳐 드디어 오늘, 다신 묶이지 않을 마지막 아침이 밝아오고 있다.

실제로 낙타 그림 속엔 낙타를 묶어놓은 끈이 실재했을까. 어쩌면 눈에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형상 없는 존재에 그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하게 목을 조르는 형상은 있었다. 이젠 어느덧 그 끈이 내 목을 서서히 풀어주려 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끈이 풀어주는 게 아니라 내가 끈을 놓는 것이지만 말이다. 필자는 아직도 묵묵히 나무 앞에 서 있을 저 낙타에게 너무 고통만 바라보고 있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고통과 원망과 아픔과 슬픔과 절망과 불행도 주겠지. 그리고 그것들을 이겨낼 힘도 더불어 주겠지. 그 정도는 돼야 사랑이지.”

모순적이게도 고통이 있는 곳은 사랑의 신 ‘큐피드’가 화살을 쏘기 가장 좋아하는 곳이라고 한다. 사랑의 화살을 쏘는 상대가 사람이라서 중요한 게 아니라, 고통이 존재했기에 더 중요한 것이다. 연인 간에 달콤한 말을 속삭이며 영원히 함께하자고 약속하는 것만이 사랑이었다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픔, 절망, 불행 등 고통이 있는 곳엔 모두 사랑이 함께하고 있었다.

고통을 이겨낼 힘, 사랑은 마치 자몽 같다. 자몽의 씁쓸함에도 찰나의 달콤함이 있기에 씁쓸함을 견뎌낼 수 있고, 달콤함은 씁쓸함이 있기에 더욱 달콤해질 수밖에 없는 것. 오늘로써 나에게 사랑이란 의미는 이렇게 재탄생했다. 애정과 애증이 한 끗 차이인 것처럼, 사랑과 고통 또한 한 끗 차이란 것을 깨닫게 됐다. 이 한 끗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앞으로 나의 인생은 불행으로 가득 찰지 사랑으로 가득 찰지 정해질 것이다.

신문사를 가는 날이면 한 손에 자몽을 쥐고 있는 힘껏 쥐어짜 씁쓸한 즙이 입안을 가득 메운 느낌이었다. 때로는 자몽의 달콤함조차 느껴지지 않는 날도 있었다. 씁쓸함 뒤엔 달콤함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로 말이다. 지금 돌이켜보니 신문사에서 보낸 낮과 밤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내가 사랑을 잊은 것뿐이지 내 곁에 사랑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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