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을 품고 비상하다
법을 품고 비상하다
  • 김유선 기자, 윤재은 수습기자, 이예빈 수습기자
  • 승인 2022.05.09
  • 호수 1548
  • 12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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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아 <법학전문대학원 법조실무전공> 교수

 

 

우리 학교 리걸클리닉 소장인 박선아<법학전문대학원 법조실무전공> 교수는 본교 법학과 93학번이다. 그는 언제든지 본인의 시간을 내어 학생들의 고민을 듣고자 한다. 삶에서 얻는 그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학생들이 맞닥뜨린 문제들을 함께 해결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문제의 완전한 해소는 아닐지라도 ‘법을 통한 사회봉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박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꼬마 변호사, 세상을 보다
경북의 한 농촌 마을에서 자란 박선아 교수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법 공부를 하겠단 마음을 먹었다. 이장이신 아버지가 마을을 대표해 구독하던 신문 덕분이었다. 꼬마 박선아는 신문 기사 속에서 법을 하는 사람들, 특히 △변호사 △정치가 △판검사들의 수많은 이야기를 보면서 법조인이란 꿈을 키웠다. “당시엔 법을 잘 몰랐지만 법이란 것이 많은 역할을 할 수 있고, 강력한 도구란 걸 어린 나이에 짐작할 수 있었죠. 그리고 법을 배워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공부는 평생의 발판’이라고 생각한 그는 치열하게 대학 시절을 보냈다. 특히 그는 대학 생활 중 “학우들과 끈끈한 정을 다졌던 새내기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답했다. “낮엔 한마당과 동아리방에서 학우들과 어울리며 여러 학내활동을 하다가도 밤엔 홀로 중앙도서관에 남아 법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죠. 매 순간 몰입하면서 부지런히 대학생활을 했던 것 같아요.”


그는 학교를 다니며 공부만 했던 ‘공부 벌레’는 아니었다. 캠퍼스 건너 뚝섬에서 봉사하며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에도 힘썼기 때문이다. “지금은 성수동이 고층 건물들이 들어선 멋진 동네로 탈바꿈했지만 이전엔 주택처럼 보이는 건물 안에서 소규모로 수공업을 하는 경공업 지대였어요. 공장들이 늘어섰던 구로와 다른 모습이었죠. 저는 지금의 성동구민종합체육센터 건너에 어깨동무란 공부방을 다녔어요. 이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을 가르쳤죠. 아이들 숙제를 봐주고 떡볶이 같은 간식을 해 먹이는 게 공부방 교사의 일과였어요.” 그는 이때를 추억하며 동시에 자신의 변호사 생활 또한 회상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변호사 생활 중에도 다른 사건보다 주변의 아이들과 관련된 사건이 눈에 들어왔던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 해요. 그들과 함께한 시간으로부터 그들의 생활상을 잘 알았기 때문에 더 마음이 쓰였죠.”

 

법이란 날개를 달다
졸업 후 박 교수는 법조인이 되겠단 일념으로 우리 학교 고시반에 들어가 사법고시(이하 사시)를 준비했다. 고시반에서 수험생활을 했던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달라 부탁하자 그는 “옆자리에서 공부하던 선배들이 사시에 합격해 고시반을 떠나는 모습을 보며, 언젠가 나도 저 선배들처럼 멋지게 빼입은 모습으로 후배들에게 소고기를 사주러 돌아올 날을 기다렸다”고 답변을 건넸다. 특히 박 교수는 “학교 다닐 때뿐만 아니라 고시반에 있을 적에도 장학금을 받았다”며 “학교의 넉넉한 지원 덕분에 어렵지 않게 학교를 다닐 수 있어 항상 학교에 감사한 마음이 있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렇게 지난 2001년 사시에 합격 후 32기로 사법연수원에 입소한 박 교수. 2년의 연수생 생활을 지나 그는 2003년 대구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다른 곳이 아닌 대구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했다. “학창 시절을 보낸 곳이 대구예요. 연수생 신분이었을 적에 고향에서 동네 이야기를 듣고 주민들에게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변호사가 되고 싶었죠. 법은 무수히 많은 세상과 연결돼 있어요. 한 사건을 수임해 그 안을 들여다 보면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만날 수 있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에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특히 우리 곁에 있는 아이들과 여성들의 이야기가 그랬죠.”


그는 사무실 개업 첫날을 떠올리며 이야기 하나를 소개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며 현재도 여성인권운동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이용수 할머니와의 첫 만남이었다. “지난 2003년 당시 저는 대구에서 유일한 여성 변호사였어요. 젊은 여성 변호사가 사무실을 개업한다고 하니 대구에 계시던 이용수 할머니가 개업을 축하하기 위해 사무실로 찾아오셨죠. 마침 개업 당일이 ‘세계 여성의 날’이었고요. 이때의 만남이 제가 지금까지 위안부 할머님 곁에서 도움을 드릴 수 있는 원동력이 됐죠.” 위안부 피해 할머니 곁에서 꾸준히 법률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박 교수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2016년 한국여성변호사회로부터 ‘여성아동인권상’을 받기도 했다.


변호사로서 일을 이어가던 중, 그는 우리 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이하 법전원)의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지금은 법전원의 ‘리걸클리닉 센터’의 소장을 지내고 있는 박 교수는 리걸클리닉 센터에 대해 “법전원 원생들이 실무를 연습할 수 있게끔 법전원 안에 마련된 법률 사무소”라 소개했다. “이곳에선 법률상담을 비롯해 지역 사회 주민들에게 실생활에 필요한 법률 지식을 제공하고 있어요. 법전원 원생들과 함께 ‘인권구제팀’을 구성해 위안부 피해 문제를 연구하는 등 영리를 추구하기보단 공익적인 인권을 위한 사회봉사기관이죠.”


날개를 펴고 그가 날아갈 방향은
법조인이자 교수로서 살아온 지난 세월 동안 그가 마음 깊이 새긴 신념은 바로 ‘리걸 마인드’다. “리걸클리닉 센터의 소장으로서 법조인으로 거듭날 원생들에게 강조하는 게 있다면 리걸 마인드에요. 리걸 마인드란 거창한 게 아닌 분쟁 해결력이죠. ‘나쁜’ 사람에 대해서도 ‘좋은’ 해결책을 주는 걸 말해요. 세상엔 올바른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올바른 사람만 좋은 해결책을 얻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나쁜 사람도 좋은 해결책을 제공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리걸 마인드죠.”


학부 강의인 ‘여성과 법’에서도 리걸 마인드를 설명하는 이유도 그가 분쟁 해결력을 지닌 개인이 사회의 갈등을 해결할 열쇠가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변호사 시절부터 여성 빈곤 문제를 봐왔어요. 분쟁 해결력을 지닌 학생들과 이 문제를 다루며 법을 통한 새로운 해결책을 함께 모색해보고 싶어요. 더 나아가 학생들이 강의를 통해 스스로가 사회구성원으로서 사회에 참여해 문제를 해결할 역량을 가졌단 걸 알고 이를 표현할 수 있는 인물로 성장하면 좋겠어요.”


법이 가진 힘으로 세상을 향한 따스한 마음을 전하고 있는 박선아 동문. 앞으로 법이란 날개를 통해 그가 꿈꾸는 세상으로 힘차게 날아가길 바란다.

 

▲ "소송을 진행하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나눠지죠. 변호사는 좋은 사람을 변호할 때도 있고, 나쁜 사람을 변호해야 할 때도 있어요. 좋고 나쁜 사람이라 해서 서로 다른 솔루션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모두가 좋은 솔루션을 제공받아야 하죠. 그게 바로 ‘분쟁 해결력’이자 제 삶을 구성하는 태도에요."

 

도움: 윤재은 수습기자 wosdlwosdl@hanyang.ac.kr
이예빈 수습기자 ybli0220@hanyang.ac.kr
사진 제공: 박선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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