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코리안 타임과 빨리빨리
[칼럼] 코리안 타임과 빨리빨리
  • 조호연<한국교육방송공사> 이사
  • 승인 2022.05.02
  • 호수 1547
  • 7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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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호연<한국교육방송공사> 이사

잘 피해 가나 싶더니 지난달 결국 코로나에 걸렸다. 그런데 자가격리 생활이 생각보다 괜찮았다. 무엇이든 천천히 해도 괜찮았다. 매일 영화 서너 편을 ‘때리고’ 늦잠을 자도 문제가 없었다. 여태껏 주인 행세하던 시간을 노예로 부리는 기분이었다. 이 기간 동안 ‘속도 있는 삶’에 지쳐 있었단 것을 깨달았다. 느릿한 생활에 대한 욕구가 강했던 것이다. 사실 코로나는 ‘속도병’이다. 운송 수단이 발달하고 교류가 활발한 나라에서 잘 퍼진다. 당연히 삶의 속도와 교류를 제한하면 통제가 가능해진다.

책장에서 굴러다니던 동화 「빨리빨리 모범생」을 읽은 것도 자가격리 때였다. 어른들이 아이들의 성격을 고치고 성적을 올리려 다그치는 내용이다. 엄마는 초시계를 들고 ‘느림보 아이’를 쫓아다닌다. 교사는 ‘문제 빨리 풀기 작전’에 메트로놈을 동원한다. 목표대로 아이들은 행동이 빨라지고 성적도 향상된다. 동시에 뭐든 빨리하지 않으면 답답해하기 시작한다. 급식 시간에 새치기하고, 문제를 빨리 풀려고 해답지를 베끼는 일이 벌어진다. 배탈이 나고 원형탈모증에 걸리는 아이들도 생기자, 가정과 학교에선 초시계와 메트로놈을 쓰레기통에 버린다. 속도보다 더 중요한 것을 놓친 걸 깨달은 것이다.

동화 속 이야기는 현실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시간에 쫓기며 숨 가쁘게 일하느라 몸과 정신에 큰 탈이 났는데도 ‘빨리 더 빨리’를 외친다. 국가 전체가 자가격리가 필요한 상황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한국은 원래 이렇게 빠른 나라가 아니었다. 광복 직후엔 ‘코리안 타임’이 유행할 정도였다. 미군정이 시간 개념이 희박한 한국인을 낮잡아 부른 말이다. 
1960년대 들어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시간은 금이 되었다. 뭐든 빨리하는 것이 선이고 정답이었다. 공문서를 당일 발급하는 세계 유일 국가, 병원에 당일 방문해 치료까지 마치는 나라는 이렇게 탄생했다. 외국에선 며칠 혹은 몇 달까지 걸리는 일들이다. 한밤중 주문하면 다음 날 오전 도착하는 택배의 미친 속도는 유명하다. 빨리빨리는 한국의 상징어로 자리 잡았다. 외국인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한국말이 바로 빨리빨리다.

얻은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 한국은 몇 초도 기다리지 못하는 집단 조급증에 걸려 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닫힘 버튼을 누른다. 수능은 또 어떤가. 대학수학능력을 측정하는 시험인데, 문제 빨리 풀기 경쟁으로 전락했다. 문제 해결력은 반드시 문제 풀이 속도와 비례하지 않는다. 선행학습도 한국 교육의  병폐다. 학생들은 골병든 지 오래다.

빨리빨리가 내면화된 한국 사회의 진짜 문제는 천천한 행동을 비정상으로 몰아붙인단 점이다. 과거 정권은 시민에게 속도를 강제하기까지 했다. 정상에 속하려면 늘 종종걸음을 치고, 계단을 뛰어 오르내려야 했다. 동화에서 어른들이 아이들을 다그친 것과 뭐가 다른가.

4차 산업혁명 시대다. 지식, 정보, 기술의 생명 주기가 짧아지고 있다. 속도가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무조건 빨리빨리가 정답은 아니다. 살아가는 데는 정상 속도란 게 존재한다. 더 중요한 게 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당장 속도를 멈추라고 주장하고 싶진 않다. 사회는 빠른 것, 느린 것을 다 필요로 한다. 문제는 조화다. 동화 속 교사의 말이 열쇠다. “무턱대고 빨리빨리 하는 건 과속이야. 멋진 화음이 나오려면 4분음표, 8분음표와 쉼표들처럼 속도 다른 것들이 조화를 이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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