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오늘] 민중 계몽의 뜻을 품고 신문을 찍어내다
[그때의 오늘] 민중 계몽의 뜻을 품고 신문을 찍어내다
  • 김유선 기자
  • 승인 2022.04.04
  • 호수 1545
  • 3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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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7일은 ‘신문의 날’이지만 서재필이 지난 1896년 우리 민족의 첫 민간지 ‘독립신문’ 창간호를 발간한 날이기도 하다. 후대의 언론인은 구한말 우리 민족을 개화하고 민중의 자주·독립·민권 의식을 고양하고자 이날을 신문의 날로 제정했다. 이번 시간엔 독립신문이 창간된 그날을 알아보고자 한다.

 

▲ 서울 종로구 신문박물관에 전시된 최초의 민간지 독립신문의 창간호(복제본)이다.

 

독립신문, 그 시작과 끝은
갑신정변을 주동한 다섯 인물 중 하나였던 서재필은 정변 실패 후 일본과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그는 갑오개혁 당시 조선에 귀국해 “개혁의 성공을 위해선 신문을 통해 개화의 필요성을 알리는 일이 시급하다”며 지난 1896년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신문의 중요성을 이해하던 정부도 그의 생각을 적극 지지하며 예산을 지원했다.

국민 계몽의 논조를 담은 독립신문은 국문과 영문을 모두 담았다. 이를 통해 조선 내부 민중의 의식을 고취시킴과 동시에 외세에 국내 상황을 전달하며 독립 의지를 전달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열강들의 이권 침탈로 인해 국내 정세가 바뀌게 되면서 독립신문도 격랑을 겪었다. 신문의 논조가 당시 내각을 구성하던 친러파 세력의 입장과 맞부딪혔기 때문이다.
 
결국 독립신문은 정부와 충돌을 겪으며 서재필은 일선에서 물러나고 미국의 선교사 아펜젤러가 신문의 주필을 맡게 됐다. 이후 정부 비판적 논조와 계몽적 논설이 완화됐고, 독립신문은 민중의 지지를 서서히 잃게 됐다. 이윽고 독립신문은 창간된 지 3년만인 지난 1899년 12월 4일, 종간호를 내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독립신문은 개화기 동안 조선의 첫 한글 신문으로써 민중들에게 계몽 의식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이에 한국신문협회는 독립신문에 대해 ‘사회발전과 민중 계몽을 위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고 말하며 독립신문이 추구한 이상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민중을 깨우는 메신저가 되기 위해선
지난 1959년, 한국신문협회는 ‘신문의 사명과 책임을 자각하고 자유와 품위 등을 강조’하고자 독립신문의 정신을 재조명했다. 그럼에도 신문은 뉴미디어의 등장 속에 무기력해지고 있다. 지난해 디지털뉴스 리포트가 발표한 한국의 언론신뢰도는 32%로 46개국 중 공동 38위였다. 가짜뉴스로 보도의 진위를 확인하기 어려운 시국 속 국민의 대다수가 언론을 외면한 결과다. 오는 7일, 신문이 국민에게 올바른 가치와 사실을 전하는 메신저로 기능할 수 있길, 그리고 언론이 건강한 방향성을 회복할 수 있길 바란다. 오늘도 신문의 지면 속 사실만을 담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기자들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린다.

▲ 신문박물관(구 동아일보사) 앞에 마련된 신문 게시판에서 시민들이 걸음을 멈추고 신문을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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