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이여, 배고픈 정의를 추구하라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이여, 배고픈 정의를 추구하라
  • 나병준 기자
  • 승인 2022.04.04
  • 호수 1545
  • 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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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상훈 프로파일러

 

인류는 범죄와 함께 진화했다. 인류가 진화할수록 범죄의 수법도 점점 지능화되고 잔혹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느 때보다 프로파일러의 역할이 중요시되고 있다. 프로파일러란 개념이 희미했던 시절, 본교 대학원 출신의 배상훈 프로파일러는 ‘국내 1호 프로파일러’로서 범죄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는 데 초석을 다졌다. 프로파일러가 주목받는 요즘, 그에게서 대한민국 범죄 수사의 과거와 현재는 어떠한지 들어봤다.
 

여러 학문을 넘나든 통섭의 아이콘
학창시절 조용하고 호기심 많은 학생이었던 그는 고물상을 운영하셨던 아버지가 가져온 세계문학전집을 보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저 버려진 책이었지만 그는 “당시 읽었던 책들이 ‘지식의 보고’로서 인생에 많은 도움이 됐다”고 전했다. 톨스토이나 헤밍웨이 등 대문호들의 깊은 고뇌와 실천이 녹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소년 배상훈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그들처럼 매 순간 치열한 삶을 살아가야겠단 밑거름이 됐다.

치열한 노력 끝에 배 동문은 고려대 화학과에 입학했지만, 취업이 잘될 것 같단 생각에 진학했을 뿐 화학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화학을 전공한 덕에 서울대병원에서 임상병리사로 활동할 기회를 얻어 의학 지식을 배우는 호재를 누리기도 했다. 그는 지난 1997년 발생한 IMF 사태로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친구의 소개로 본교 문화인류학과 정병호 교수를 알게 돼 그는 그 길로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대학원에서 새출발에 나선다. 그 뒤 고려대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프로파일러가 전하는 불편한 진실
그런 그가 프로파일러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사회 정의(正義)에 대한 불편함’이었다. 이를 두고 그는 지난 2004년 민주노동당의 정책보좌관으로 채용됐으나 그만두게 된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당시엔 대부분 인맥으로 뽑는 게 일반적이었어요. 그런데 이런 방식이 문제가 된 이후 공개채용으로 전환됐죠. 제가 공개채용으로 들어간 사람이었고요. 그런데 알고 보니 제 자리엔 이미 내정된 누군가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전 이걸 공론화시키고 싶었지만 침묵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스스로가 굉장히 분했어요. 이런 분노가 ‘경찰이 돼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진 거죠.”

그렇게 ‘국내 1호 프로파일러’란 타이틀을 거머쥔 배 동문. 그러나 그가 처음 활동했을 때만 하더라도 △부족한 인력 △불분명한 정체성 △열악한 시스템 등의 이유로 업무 환경이 좋진 않았다. 특히 그는 프로파일러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에 대해선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프로파일러는 세 가지 업무를 주로 수행합니다. 범죄자와의 면담, 범죄자의 행동심리학적 분석, 사건의 *스크리닝 작업이 일반적이죠. 이 역할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은 채 프로파일러를 선발했으니 논란이 생기는 건 당연한 거예요. 그러다 보니 수사기관 내에서 인정받지 못하기 일쑤였죠.”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배 동문은 묵묵히 제 할 일을 수행했다. 매일 서너 시간씩 몇 주간에 걸쳐 범죄자와 심리 싸움을 벌였고, 분석한 내용을 끊임없이 검증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그는 이 과정을 ‘야생마 길들이기’에 빗대어 표현했다. “야생마를 길들이기 위해선 최소 일주일이 걸리거나 혹은 영원히 길들이지 못할 수도 있어요. 범죄자도 마찬가지예요. 심지어 만나서 아무 말도 안 하는 경우도 있어요. 하지만 보통 이들은 자기표현 욕구가 강해서 침묵을 못 견디죠. 이를 역이용하는 겁니다.” 그 역시 사람인지라 범죄자와의 심리전에서 밀린 경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 심리전에서 밀리면 오히려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실패를 빠르게 인정하고 다른 팀원으로 교체해야한다”고 답했다. 프로파일러가 단독으로 행동하기보단 팀으로 활동하는 이유 중 하나다.

지난 2010년부터 2018년까지 서울디지털대 경찰학과 교수로 활동한 그는 최근엔 팟캐스트와 유튜브를 통해 대중을 찾아가고 있다. 그는 세월호 참사가 미디어 플랫폼에서 활동하게 된 계기였다고 전했다. “언론사로부터 유병언 사체가 발견된 정황을 설명해주길 바란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흔쾌히 응했지만 지나고 보니 언론이 주도한 화제 돌리기에 일조한 저를 발견했어요. 세월호 참사의 본질은 유병언 잡기가 아닌 구조적 문제잖아요. 자괴감이 들었죠. 그래서 진실을 감추기 위해 범죄를 가십거리로 만들고 전문가들이 이에 동조하는 현실에 맞서 진실을 알리고자 활동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범죄는 대비하지 않고 방관하면 폭발적으로 늘 수밖에 없습니다."

 

정의의 길, 그 종착점까지
지난달 종영한 SBS 드라마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을 비롯해 tvN 예능 프로그램 「알쓸범잡 2」 등 무겁게만 여겨졌던 범죄 사건이 방송의 새로운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배 동문 역시 이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한편 우려스럽다고 주장했다. “방송을 본 학생들이 이 직업을 그저 멋있고 쉽게 보진 않을까 걱정됩니다. 사실 몸과 마음 모두 힘든 직업이거든요. 방송에서도 범죄자에게 서사를 부여하기보단 현실적인 내용을 다뤄줬으면 좋겠어요.”

끝으로 프로파일러를 지망하는 학생들에겐 “정의에 대한 신념을 가지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정의는 결코 배부를 수 없습니다. 배고픈 정의의 길은 힘들 테고요. 어떤 길을 가는지는 여러분의 선택이지만 큰 용기를 가지고 시스템에 도전하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더 많은 이들이 범죄를 제대로 알고 대비할 수 있도록 과거 사건에 대한 공개가 이뤄지는 걸 자신의 사명이라 생각한다는 배 동문. 필자는 그에게서 배부른 돼지가 아닌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보았다. 지금도 ‘배고픈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외로운 싸움을 벌이는 그를 응원하며 우리 사회도 투명한 사회로 나아가길 바란다.
 

▲ 정의를 추구하는 건 배고픈 일이라고 생각한 배 동문. 실제로 정의를 추구하면서 수많은 반대를 받았기에 그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는 그였다. 그럼에도 그 길을 묵묵히 걸어온 그는 스스로를 ‘배고픈 정의’라고 표현했다.

 

*스크리닝: 과거부터 최근까지 발생한 수사 사건을 정리하는 작업을 말한다.
사진 제공: 배상훈 프로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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