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다
낯선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다
  • 김유선 기자
  • 승인 2022.03.02
  • 호수 1542
  • 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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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호<국문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안양천변에서 야학 교사로 일하던 시절부터 ERICA캠퍼스의 교수가 되기까지 정병호<국문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는 교육자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아이들을 위한 복지와 교육에 대한 일념으로 한반도를 누비며 활동한 정 교수. ‘공동육아·공동체교육’의 선구자이자 북한학 전문가인 그는 오랜만에 들은 교수란 호칭이 아직도 어색하다는 말과 함께 수줍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쓰라린 시기를 딛고 대학에 가다
소년 정병호는 지난 1970년대, 유신의 엄중하고도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어느 날 그는 광화문 앞의 탱크를 향해 “민주주의가 죽었는데 뭐가 멋있냐”는 친구의 말에 충격을 받게 된다. 유신 자체에 대한 진중한 고민 없이 그 모습에 감탄한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신의 냉혹한 현실을 알고 진정한 정의에 대해 고민을 거듭하던 소년은 친구 여섯과 함께 그들의 의견을 세상에 알리기로 한다.

그렇게 독재 정권에 맞선 그는 지난 1972년 10월,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유인물이 발견됐단 이유로 체포돼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된다. 다행히 한 달 만에 풀려났지만 그는 대학시절을 선고유예 상태로 지내야만 했다. 

정 교수는 두 차례의 학력고사 끝에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했으나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고 전했다. “대학교육을 특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캠퍼스에서 대학 시절을 보내기보단 정문 앞 호프집에서 친구들과 정치와 사회에 대해 논했죠. 이 또한 나름의 정치학 수업이자 공부였다고 생각해요.”

안양천변의 야학교사, 문화인류학자가 되다
한평생을 ‘공동육아·공동체교육’을 구현하는 데 헌신한 정 교수. 대학생이었던 그는 대안교육을 향한 포부를 안고 안양천변의 판자촌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그는 소년 노동자를 위한 해송보육학교의 교사로 일을 시작한다. 특히 “아이들이 일하면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하고 싶었다”며 교사로서 가졌던 포부를 밝혔다.

이어 그는 당시 목격한 충격적인 일화를 소개했다. “학교로 수업을 들으러 오던 한 아이가 하루는 손에 붕대를 감고 잔뜩 취한 채로 등교를 했더라고요. 알고 보니 작업 중 기계에 손가락 전부가 절단됐더군요. 그런데도 사장은 아이의 뺨을 때리며 윽박질렀다고 합니다.” “더 충격이었던 건 자신을 마음씨 좋은 사장이라 말하며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 치료만 하고 비싼 약 대신 술을 사줬다는 것입니다.” 이 일화를 통해 정 교수는 “교육은 바로 이들이 ‘알고 말할 수’ 있도록 존재해야 한다”는 다짐을 했다고 전했다.

야학교사로 활동한 이후로도 ‘해송아기둥지’와 ‘공동육아협동조합 어린이집’ 등 여러 돌봄시설을 만들며 어린 약자를 위해 앞장선 정 교수. 해송아기둥지를 설립하게 된 계기에 관해 묻자 그는 텅 빈 교실에서 혼자 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 아이들이 왜 여기서 놀고 있을까 궁금했어요. 아이들을 따라가 보니 가족 모두 일을 나가 있을 공간이 없었던 상황임을 알게 됐죠. 그제야 말로만 이뤄졌던 공동육아·공동체교육이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깨달았죠. 그렇게 ‘이 아이들이 안전하고 편하게 머물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고 해송아기둥지를 만들었어요.”

그러다 지난 1980년 서울의 봄, 정 교수는 해송아기둥지를 뒤로 한 채 미국 이민 길에 올랐다. 정권의 위협을 받는 선고유예란 상태가 그를 옥죄었기 때문이다. 맨몸으로 부딪힌 이국은 그에게 많은 가르침을 줬다. 소위 대학 나온 엘리트인 자신이 피자 배달원, 홀 서버 등을 하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는 외국인 노동자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이에 정 교수는 야학과 어린이집의 경험들을 돌아보며 자신이 겪어온 경험들을 연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대학원에 진학해 인류학을 공부하게 됐다. “내가 살아온, 익혀온 틀 밖의 문화를 접하고 그 대안을 공부하는 학문이 문화인류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그는 귀국 후 다시 어린이집 일에 전념한다. 자신이 북한학 전문가로 알려져 있지만 이 또한 공동육아·공동체교육이란 일념 아래 이뤄졌단 정 교수. 북한 구호에 나서게 된 이유에 대해선 “대기근이 왔던 북한에 구호 물품을 보육원의 이름으로 전달하고자 했던 일이 커져 시작하게 됐다”고 전했다.

아이들을 위한 따뜻한 이야기 할아버지처럼
퇴직 후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의 낮잠을 부르는 이야기 할아버지가 되고 팠다는 정 교수는 지난 2020년 여름을 끝으로 정든 교단을 떠났다. 그는 본교에서의 생활을 ‘뜻밖의 행운’이라 표현했다. “대학은 성장의 마지막 관문이라 같은 것을 배워도 학생들은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길을 선택하더라고요.” 저술 활동 역시 학생들과 함께 만든 것으로, 정 교수는 “나조차도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며 성장할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끝으로 학생들에게 전하고픈 말을 묻자 “한 번쯤은 우리 사회를 면밀히 관찰하며 진중한 고민을 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전공과 직업이 일치할 수는 없지만 학생들 스스로가 치열한 고민 끝에 얻은 답으로 삶을 꾸려갔으면 좋겠어요.”

적십자사 총재 특보로 임명돼 향후 북한 구호 지원에 대비한 교육에 나설 예정이라는 정 교수. 그는 지금도 캠퍼스 안 연구소에서 신간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기자를 지긋이 응시했던 그의 시선이 오래도록 이 세상에 남아있기를 바란다.

▲ 북한말인 ‘일없어’는 우리말로 ‘괜찮아’를 뜻한다. 북한 이탈 청소년 교육기관 ‘하나둘학교’에서 ‘일없어 교장’으로 불렸던 그는 인자한 웃음으로 보기만 해도 안심되는 무탈한 선생이란 점에서 스스로를 ‘일없어 선생’이라 표현했다.
▲ 북한말인 ‘일없어’는 우리말로 ‘괜찮아’를 뜻한다. 북한 이탈 청소년 교육기관 ‘하나둘학교’에서 ‘일없어 교장’으로 불렸던 그는 인자한 웃음으로 보기만 해도 안심되는 무탈한 선생이란 점에서 스스로를 ‘일없어 선생’이라 표현했다.

김유선 기자 afa0821@hanyang.ac.kr
사진 제공: 정병호<국문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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