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한대신문 문예상 비평 가작] 와인즈버그에서
[2021 한대신문 문예상 비평 가작] 와인즈버그에서
  • 정현우<국문대 영미언어문화학과 15> 씨
  • 승인 2021.11.29
  • 호수 1540
  • 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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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우드 앤더슨의 와인즈버그, 오하이오Winesburg, Ohio. 소통과 성숙에 관한 이야기다. 작품 속 소통의 형태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성숙한 조지 윌러드와 헬렌 화이트, 동질적인 엘리자베스 윌러드와 의사 리피의 매끄러운 교류가 있는가 하면 그 외 단편들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전부 소통의 실패라고 할 만하다. 타자를 철저히 배척하는 이노크 로빈슨의 내면 침잠, 앨머 카울리와 세스 리치먼드처럼 합당한 이유 없는 부적절감으로 스스로 차단한 사회적 교류도 있고 과거 케이트 스위프트와 조지 사이에 있었던 소동이 보여주듯 그나마 소통하는 인물들도 오해를 빚곤 한다. 사회와의 거리감이 고통을 동반하지 않는 톰 포스터 같은 경우마저 남들과 비슷해져 보려고 시도하는 모습을 통해 사람은 누구든 나름대로의 소통을 갈구하는 사회적 동물임도 역설되고 있다.

책의 모든 모든 부분에 적용할 수 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거시적인 차원에서 소통과 견고하게 결부된 하위 주제는 개인의 성숙이다. 미성숙하고 소통에 무척 서툰 괴짜들의 인간 소외 문제를 다룬 단편들을 일차적으로 나열하면서도, 그와 무관해 보이는 인물 조지 윌러드의 성장담을 병렬적인 서사로 삽입해 엮어내고 있다. 조지 본인도 미성숙했던 시절 다른 이와의 소통에 시행착오를 겪었던 일이 묘사된다. 조지가 단순 전달자로서 소모되고 있다거나, 괴짜들의 이야기와 그의 성장담이 서로 무관하다고 할 수 없는 이유이다. 조지와 그들은 정도의 차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문제를 경험한다. 물론 작품에서는 조지를 통해 해답을 제시한다. 작품을 정리하는 단편 세련Sophistication에 이르러 둘에게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소통이 허락될 때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이들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소통 의지와 더불어 각자의 삶의 내력 속에서 이룩해낸 성숙이었다.

앤더슨이 소통의 해답으로 성숙만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 막바지의 단편 죽음Death에서 의사 리피와 엘리자베스 윌러드는리피가 책의 다른 괴짜들보다는 나은 편이기는 하지만그들 두 사람의 성숙함보다는 상호 동질성을 기반으로 서로와 통하게 된다. 리피가 엘리자베스를 묘사한 방식, 가령 같은 신들을 섬긴다든지 스스로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그녀는 행복해했다.” 하는 등의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소설에는 소외감 속에 살아가는 인물들이 무더기로 등장하는데, 어느 정도 읽어내려가다가 누구나 가졌을 법한 의문, 비슷한 종류의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끼리 만난다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지에 대한 답으로서 제시되어 있는 단편이다.

엘리자베스와 헬렌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자신의 내면과의 소통에 결국 성공했다는 것이다. 타인을 알기 위해서는 자신을 먼저 알아야 한다. 타인을 답으로 간주하기 위해 개인적 답을 먼저 얻어야 한다. 앤더슨은 소통의 문제를 두고 사회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내면적인 방향으로도 탐구를 이어가고 있다. 이전까지의 내용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라그렇다는 사실이 직설적으로 언급되는 수준이다파국으로 치닫는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했었다. 헬렌은 달랐다. 자기 내면이 무엇을 원하고 원하지 않는지를 확실히 알고 있어 속물근성이 있는 남자를 버리고 조지에게 향한다. 실제로 행복을 찾는 데 성공한다. 엘리자베스 윌러드는 사실 처음부터 그 둘을 명확히 구분할 줄 알았던 것은 아니다. 이것이 실제로 불행한 결혼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녀는 사랑이라는 막연한 상태만을 원해 왔으며 톰 윌러드라는 남자와의 부부 관계로 그것이 구체화됐을 때는 알고 보니 그가 자신이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불행해졌다. 리피의 말대로 부드러운 밤바람이 불어오는 나무 아래에서 살려고 했다가 실망의 긴 뜨거운 낮이 순식간에 찾아온것이다. 결혼생활 중 자신의 내면에 집중한 탓에 불행을 더욱 날 선 감각으로 체감했지만 한편으로 그 시간은 마음이 가진 명확한 호오에 관한, 자신이 진정으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지에 관한 숙고와 발견의 과정이기도 했다. 그녀가 올바른 상대 리피를 만나 가까워지고 마침내 그의 팔에 안겼을 때를 그녀에게 해방이 주어진 때로 작품도 묘사하고 있다.

책에는 연애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서로 사랑하는 남녀의 것만큼 자신의 모든 것을 솔직하게 서로에게 드러내는 관계는 없다. 소통의 최상의 형태는 사랑이다. 육욕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사랑이라면 그러하다. 육욕은, 몸으로 하는 대화는 정신적인 대화를 소거할 위험이 있다. 조지는 세련Sophistication의 단계에 이르기 전까지는 여성을 거의 성적인 대상으로만 생각해 온 바 있다. 작품 초반부터 그런 면모를 드러냈으며 선생님The Teacher에서 결정적으로 그런 자신의 문제를 발견한다. 그러나 그 반립으로서의 금욕주의적 이성 관계도 답이 아닐 것이다. 사람은 정신적인 존재인 만큼이나 육체적이고 성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중용이다. 특히 여성에게 있어서는 성적인 끌림이 인간적인 끌림과 별개의 것이 아니기도 하다. 존경을 느끼게 하는 남성에게 성적으로도 흥분하기 때문이다. 세련Sophistication에서 헬렌이 조지를 향해 느끼는 감정의 주요한 측면 역시 크게 우러러보는 수준은 아니지만 모종의 존경심인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성적인 끌림과 인간적인 끌림 모두를 남김없이 경험하는 것은 두 사람 사이의 온전한 이어짐과 흔치 않은 소통의 계기를 마련한다. 그런 관계에서 둘은 서로 간의 적당한 거리 또한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세련되지 못할 만큼 가까워지거나 필요 이상으로 멀어지는 일이 없다. 마치 사랑이 주가 되고 육욕이 먼발치에서 따라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니체 잠언을 실천하듯 조지와 헬렌은 서로 육체적으로 격렬해지다가도 이내 떨어져 상호 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더욱 잔잔하고 낭만적인 기분에 젖는다. 중요한 장면이다. 육체적인 것은 고사하고 정신적으로도 지나친 가까워짐은 대부분 거짓인데, 서로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 해도 별개의 인격으로서 둘에게는 서로의 교집합에 속하지 않는 정신적인 영역이 부정할 수 없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냉담한 진실에도 불구하고 둘은 멀어지지 않는다. 관계에 대하여, 그러한 진실을 너도나도 알고 있다는 점에서 둘은 오히려 서로를 더욱 각별하게 느낀다. 그와 같은 관계의 결과는 더 이상 선생님The Teacher에서와 같이 허무한 것이 아니다. 둘은 근시안적으로 섞인다기보다, 독립된 개인이자 각기 다른 남자와 여자로서 상호작용하여 각자의 장기적인 존재에 필요한 답을 찾는다. “그들의 성숙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무언가를 포착한다.”

소통이 갖는 일단의 의미는 고독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데 있을 것이다. 건강한 관계는 행복한 삶의 필수적인 요소다. 하지만 더 나아가면 소통의 의미와 필요성을 의외의 곳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니체는 사람의 위치는 타자들을 통해서만 측정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고독Loneliness에서의 이노크 로빈슨은 그것을 부정한다. 그가 타자와의 소통을 전면 차단하고 내면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것은 못난 자신을 부정하고자 하는 시도다. 그가 내면으로 침잠하는 것은 타고난 내성적 기질이 작용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역설적으로 외부 세계를 너무 의식한 탓이기도 하다. 그는 실제로 세계 속의 자신의 위치에 신경을 쓴다. 중요해 보이는 사회 · 정치 이슈를 주워섬기며 처음 보는 남자에게 시가를 넘겨받은 것지식인으로 인정받은 것에 대해 기뻐하고, 스스로를 중요 인물이 되어 가고 있다며 즐거워하는 허영심이 이 은둔자에게 뜬금없이 나타난 이유가 그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자신이 실제로 그 정도 위치가 아니라는 것을 내심 알고 있으며 그런 자각은 결국 사회적 가면을 유지하는 데 힘이 부쳤던 그를 도로 혼자만의 공간에 틀어박히도록 한다.

마치 깨달음An Awakening에 묘사된 허구의 인물들 앞에서 조지가 그랬던 것과 같이, 방 안의 그는 자기 상상 속에서 일종의 거물급 인사가 된다. 현실이 이상을 따라가지 못하자 현실로부터 도피해 이상의 세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물론 거짓되고 불안정한 것이어서 현실의 성숙한 여성의 모습으로 나타난 진실의 힘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 버린다. 조지는 힘센 에드 헨드비에게 당해 자신에게 불어넣었던 얄팍한 헛바람을 직시하거나, 작은 주먹으로써 자신을 비난한 선생을 원망하기보다 자신이 한 일을 반성할 수 있었다. 나이도 늦은 이노크는 너무 오랜 기간 동안 강도 높게 실제 세계와의 소통을 차단한 끝에 혼자 힘으로 설 수 없는 불구가 되어 바이올리니스트를 원망하고 윌러드 같은 성장을 이뤄 내지 못한다. 소통은 늘 치유의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외부와의 소통은 그 자체로 자신을 위험한 세계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자신의 방, 자신의 치부를 다른 사람의 냉정한 눈을 통해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것, 스킨십을 하려다 비난당하거나 다른 힘센 사람의 손에 내동댕이쳐질 위험을 허용하는 것이다. 소통을 차단하는 것은 자기 객관화를 통한 성장의 가능성을 전면 차단하는 것이기에 위험하다. 미성숙하게 남는 것은 고독해지는 것만큼이나 개인을 비극적으로 만든다. 많은 경우 그 둘은 사실 별개가 아니다. 상술했듯 성숙은 성공적인 소통의 전제다. 그리고 역으로 시행착오를 동반한 소통의 과정 역시 성장과 성숙의 계기를 마련한다고 할 수 있다.

소통의 부재로 인해 가장 많이 망가진 인물로 철학자Philosopher의 의사 퍼시벌을 꼽을 수 있다. 퍼시벌은 조지 윌러드를 제외하고는 사회적 창구를 찾지 못한다. 그의 많은 행동이 부자연스럽고, 과거는독자 입장에서 그의 말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수수께끼이며, 지나치게 자기만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의사라는 직업은 환자들을 통해 불특정 다수의 대중과 접한다. 그는 환자들을, 대중을 멀리하고 사회에서 고립된다. 세상도 그를 중요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데도 도리어 사람들이 기억도 하지 못하는 자기 행동의 업보를 두려워한다. 현대로 치면 자발성과 비자발성이 뒤섞인 은둔형 외톨이인 그는 칩거 속에서 점점 기이한 색채를 띠어 가고 내면에 모순을 형성하며 마치 기독교 신학과 니체 철학을 곡해한 듯한 자신만의 사상으로 점철된 괴짜 사상가philosopher가 되어 간다. 그러고 나서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지지 못할 그 사상을 외부 세계에 전달할 단 한 사람의 기자를 찾는다.

일하지 않으면서 경제적으로 문제없이 지내는 자신이 범죄자처럼 보이지 않느냐고 거드름을 피우는 퍼시벌은 윤리관이 희미한 듯 보인다. 그러나 범죄자는 강자다. 니체가 기존의 윤리관에서 자유로운 강자를 역설했듯 그도 자신만의 강자 사상을 설파한다. 다만 주어진 윤리를 순종적으로 따르는 대신 자신의 윤리를 주체적으로 형성하고 스스로 그것을 따를 줄 아는 사람을 숭상하는 니체의 그것과는 동떨어진 듯하다. 인간성을 포기하면서까지 강자가 되기 위한 노력이 역으로 그를 처형의 공포로 몰아넣는다는 사실이 백미다. 사실 그는 자신의 형처럼 반사회적인 성격을 타고난 채 저절로 고립되고 인간성과 멀어진 것은 아니다. 십자가형에 처해질 일 없는 강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그가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어쩌면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한 순간의 실수로 사회에서 자신이 늘 되기를 경계해왔던 존재가 되며, 그리고 그것으로 끝인 상황일 수도 있다. 사회를 두려워하는 로빈슨과 퍼시벌의 캐릭터는 언뜻 폐거를 즐기는 이들에 대한 묘사로 보이지만 실은 건강한 사회적 삶을 누구보다 염원하는 좌절한 이들의 뒤틀린 초상이다.

고립, 소외, 괴기성 그리고 그것을 야기하는 부조리와 소통의 실패 또는 동반된 프로이트적 욕구 등을 복합적으로 담아낸 소설은 바로 이들 주제로 인해 미국 최초의 현대 문학으로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허구의 작은 마을에서 산업화의 여명기라고도 할 수 있는 시대 배경을 활용해 산업 사회로 접어들면서 심화하기 시작한 소통의 문제를 탐구한 작품은 이를 중심 주제로 삼아 그 문제의 이면을 드러내는 상징들을 풍부하게 사용하여 묘사하고, 소통에 실패하는 기이한 괴짜들 각자를 비난하기보다 그들이 놓인 힘겨운 부조리에 대한 이해를 허용하는 시선으로 보듬으면서도 개인적 성장을 통한 극복을 역설하고 종용할 필요도 놓치지 않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세련Sophistication에서 성장을 이뤄낸 조지와 헬렌이 말없이 보여준 성숙하면서도 원활한 수준에 이른 소통이 독자에게 주는 울림은 앤더슨이 피츠제럴드 덕에 갖게 된 가장 훌륭하고 섬세한 글을 쓰는 영미권 작가라는 명성이 과장된 것이 아님을 알게 한다.

미약하게나마 니체 철학 · 잠언들과 교차시키며 분석해 보았으나 실제로 앤더슨이 니체로부터의 영향을 표명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안다. 영감은 그보다는 프로이트로부터 왔다. 다만 니체의 영향력이 근현대 지성사 전체에 녹아들어 있으며 프로이트와 니체 양측이 쇼펜하우어의 사상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접점이 있으므로 와인즈버그에서 독일 망치 소리를 한번 들어 보고자 시도하여도 아주 부적절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소설의 정직하리만치 간결한 문체에도 불구하고 크게 두드러지는 것은 일부 단편들에 있어서의 핍진성의 결여이다. 지나치게 기이한 몇몇 인물들의 극단적인 행위를 묘사할 때 작가는 글의 분위기를 다소 비현실적인 쪽으로 이끌어간다. 심지어는 조지 윌러드마저 종종 그러듯, 실제였다면 연극적이라 할 정도로 어색한 독백이 나오는 것도 특유의 비현실성을 보탠다. 그러나 단편소설이라는 매체에서 이는 그다지 큰 단점이 아니며 오히려 현실성 못지 않게 상징성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이 작품에서는 인물의 독백이 그 내면을 대변하는 의미심장함으로 이루어졌다는 의의를 넘어 정말로 그 입 밖에 내어졌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같은 맥락에서, 고의적으로 연출된 기이한 군상들의 괴짜적 면모의 과장됨 역시 각자 하나의 원형으로 구현되어 독자로 하여금 강렬하고 잊지 못할 인상을 받게 하는 장치가 된다. 문학은 종종 보이지 않는 정신을 물질적인 실체로서의 상징을 통해 담아낸다. 와인즈버그의 기인들 각자가 틀어박힌 방처럼 소통의 부재는 외부 세계와의 원활한 소통이 단절된 개인적 공간을 이용해 형상화되고 있다. 이는다니엘 디포의 책에서 인물 이름을 따온 것 아닌가 싶은이노크 로빈슨의 이야기 고독Loneliness에서 가장 짙은 색채로 완성된다. 이러한 성취에서 비현실성은 크게 중요하지 않게 된다. 픽션이 현실과 관계하는 방법은 실로 다양하기 때문이다.

쓰인 지 백여 년이 지난 와인즈버그, 오하이오Winesburg, Ohio는 오늘날 비대면이 일상화되면서 다시 현실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등교 시간부터 하교 시간까지, 출근 시간부터 퇴근 시간까지 개인적 공간을 벗어나 돌아다니던 자아들이 종일 개인적 공간에서 제한적인 소통을 경험하게 되었다. 외부와의 연결이 아주 끊어진 것은 아니라며 낙관하기에는 이 사람과 저 사람의 물리적 위치 사이에 차선 한둘과 적당히 까만 유리 한두 장만 놓아도 얼굴 맞대고는 못할 막말이 나가는 존재가 인간임을 우리 모두 안다. 정말로 위기를 맞은 것은 십 대들이다. 적응적인 사회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필요한 공감 능력은 15세 전후의 청소년기에 활발한 사회적 교류를 통해 완성된다. 아이를 키우는 데에는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고 했다. 좁은 방 안 고통받는 군상들을 창조한 작가의 글이 지금 경종을 울리는 가장 큰 이유이다. 우리를 죽이지 못하는 역경은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지금 그런 역경 중 하나를 신체 건강한 모든 이가 의무적으로 2회씩 14일 간격으로 겪도록 하고 있다. 인제는 신체를 넘어 정신을 돌볼 때다. 전 세계로 확장된 와인즈버그에서 성장하는 법을 통찰해야 한다. 몸은 갇혔으되 몸만 갇혀야 한다. 차가운 시선과 힘센 손을, 계속해서 초대해야만 한다. 언어와 소통이 시작된 이래 누려 오던 치유와 성장의 기회를, 끝내 기차에 올라 와인즈버그에서의 삶 또한 뒤로하는 날까지, 잃지 않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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