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자율성과 고유성 무시하는 혁신법, 이대로 괜찮은가
학문의 자율성과 고유성 무시하는 혁신법, 이대로 괜찮은가
  • 임윤지 기자
  • 승인 2021.11.08
  • 호수 15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학가가 국가연구개발혁신법(이하 혁신법)에 대한 법 개정을 촉구하고 있다. 과학기술 분야에 초점을 맞추고 제정된 혁신법이 성격이 다른 인문사회 분야에도 일률적으로 적용됨에 따라 인문사회 연구의 발전을 막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지난 1월부터 시행된 혁신법은 국가연구개발사업에 관한 공통의 규범을 마련함으로써 국가연구개발사업이 체계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제정됐다. 즉, 부처별로 다르게 적용해오던 연구개발 관리 규정을 일률적으로 통합하고 연구 과정 전반에서 발생하는 불필요한 행정부담을 제거해, 연구자들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함이다. 정부의 연구비 지원을 받는 모든 사업이 대상인 만큼 인문사회 분야도 적용 대상이 됐다.

그러나 문제는 과학기술 분야를 중심으로 제정된 혁신법을 인문사회를 비롯해 모든 연구 분야에 적용함에 따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부)에서 연구 과정 및 연구비까지도 포괄적으로 관리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전까진 인문사회 분야 연구는 연구산업진흥법에 따라 교육부에서 관리하고 연구비를 집행해 왔다. 하지만 혁신법이 제정되고 여기에 인문사회 분야까지 포함되면서 과기부에서도 인문사회 분야 연구에 개입하게 돼, 현재 교육부와 과기부 간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이에 위행복<국문대 중국학과> 명예교수는 “인문사회 연구 사업을 계획하거나 관련 규정을 바꾸려면 교육부가 아닌 과기부 장관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며 “이는 학문 간 융합이 아닌 간섭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서울캠 인문사회계열 교수 A씨도 “현재 과기부에서 제작하고 있는 연구과제통합관리시스템 역시 인문사회 분야의 연구 활동을 반영하기 어렵게 구성돼 있다”며 “이는 이공계 기준으로 ‘통합 관리’에만 초점을 맞춰 인문사회 연구의 특수성과 고유성을 무시하는 것”이라 꼬집었다.

나아가, 전문가들은 혁신법 규제 대상에 대학재정지원사업이 포함됨에 따라 대학 내 원활한 사업비 사용에도 차질이 생길 수 있다고 말한다. 대학재정지원사업은 대학 교육 발전과 인재양성을 위해 수행되는 사업이고, 혁신법은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개발 과제를 관리하는 법이다. 각각 성격이 다르기에 혁신법이 고시한 사용기준을 대학재정지원사업에 적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A교수는 “혁신법에 적용받는 사업의 경우 학생연구원은 단일 과제만 참여할 수 있다”며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연구 수행에서 필요한 인력을 활용할 수 없을뿐더러, 학교 간 공동연구 진행 과정에서도 어려움이 따를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결국, 인문사회계열 연구자들은 혁신법이 그 취지와 반대로 오히려 국가연구개발의 효율성을 저해하게 될 것이라 말한다. 각 학문 분야가 가진 고유한 연구의 목적과 방법이 있는데, 학문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여러 부처의 연구개발 사업 규정을 획일화하는 것은 오히려 학자들의 행정 업무 부담을 높인다는 것이다. A교수는 “인문사회 학문에 적합하지 않은 운영방식과 문서정리 방식을 관리해야 하는 정부 내부적으로도 운영 면에서 비효율을 초래할 것”이라 지적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궁극적으로 혁신법에서 인문사회 분야는 제외돼야 한다고 말한다. 위 교수는 “학문끼리 같이할 게 있고 각자 따로 갈 게 있는데, 혁신법은 인문사회 학자들의 의견도 제대로 수렴하지 않은 채 졸속 입법됐다”며 “혁신법 적용 대상을 과학기술 분야로 제한하고 인문사회 분야의 학술연구 지원 및 예산 책정 역시 별도로 다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학계 연구자들은 국가가 지원하는 연구비에 대한 책무를 다해야 하며, 그에 따른 학문 간 긴밀한 협조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데엔 누구도 이견이 없다. 그러나 이는 일방적인 연구체계 통합과 간섭까지 내포하진 않는다.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관리란 명목으로 학문의 고유성과 자주성을 침해하고 있는 건 아닐지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볼 때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