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너’, ‘나’가 아닌 ‘우리’란 이름으로
[칼럼] ‘너’, ‘나’가 아닌 ‘우리’란 이름으로
  • 김천웅<사회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박사과정 수료
  • 승인 2021.09.13
  • 호수 1535
  • 7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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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웅<사회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박사과정 수료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일상을 잃은 분노가 온·오프라인 상에서 만연하고 있다. 이러한 분노는 파편화돼가던 우리 사회 내의 언어적·물리적 공격이 성행하도록 촉매제가 됐다. 코로나19 발원지가 아직 확실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추측성 보도를 대서특필하고 서구에선 아시안 혐오가,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이 국경 내에선 특정 국가나 지역을 향한 혐오가 한창 진행 중이다.  
 
얼마 전 우리 학교 인권센터와 비상대책위원회에서 공동으로 진행했던 ‘사랑의 실천’ 챌린지를 얼핏 본 적이 있다. 그 일환으로 익명 온라인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에서의 혐오 현상이 재차 언급됐는데 이런 현상은 비단 코로나 시기에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이 가상공간 속에선 사회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성별 △이념 △인종 △지역 갈등 등으로 인한 혐오는 물론, 다양한 집단은 저마다의 특성과 동질감을 공유하기 때문에 집단 간의 갈등 유형 역시 다양하다. 서울캠퍼스인지 에리카캠퍼스인지를 나누고, 같은 캠퍼스 내에선 입학 유형을 두고 구분한다. 같은 입학 유형 속에선 문과와 이과가 서로를 비하하고 공격을 퍼붓는다.

이런 유(類)의 현상에 대해 일부 비판가들은 신자유주의가 세계적 범위 내에서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정립됨에 따라 그 통치술인 ‘분할의 통치’가 작동돼 분절과 파편화를 가져온 결과라고 분석한다. 하지만 사람은 이성의 동물이고, 혐오는 편견으로부터 생성된다고 할 때, 한 대상에 관한 정보의 불충분은 평면적인 인식을 가져올 수밖에 없고 나아가 편견을 가져온다. 이렇게 편견의 생성은 인식의 한계로 인한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문제는 편견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있으며 편견을 진리인 양 위장하고 이를 이용하려는 인간의 교활함에 존재한다. 

우선, 어리석음으로 인한 인간의 자만은 수천 년간 고정불변한 교육의 방식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우리의 교육은 항상 정답을 제시해 주고 그 정답을 일명 ‘바른 것’이라 칭한다. 하지만 ‘바른 것’이 있으면 ‘그릇 된 것’이 있기 마련이고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는 인류가 이 세계를 탐색해 나감에 있어 사상적 족쇄가 돼 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다름’을 ‘틀림’으로 인지하는 듯하다. 푸코의 지식과 권력의 개념을 차용해 덧붙이자면, ‘정상’과 ‘비정상’을 비롯한 모든 판단기준은 권력에 의해 좌우된다. 따라서 편견이 진리로 돼 버리는 것은 ‘사회적 다수’와 ‘사회적 소수’의 구분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특정한 집단이 상대적인 우위를 나타내기 위해 ‘사회적 다수’를 결성하며 사용되는 교활한 수법이라 할 수도 있겠다. 

사회의 파편화가 지속되고 있는 이 시점에 각 나라에선 재차 자국 또는 자민족 중심의 공동체 의식을 조성하고 있다. 세계화를 추구하던 미국은 민주당이 집권했음에도 여전히 ‘아메리칸 퍼스트(American first)’를 강조하고 ‘만국 노동자의 단결’을 꿈꾸던 중국은 ‘중화민족’의 개념을 내세우고 있다.

혐오를 막기 위해선 차별을 단절해야 하고, 차별을 단절하기 위해선 ‘너’, ‘나’가 아닌 ‘우리’란 개념의 정립이 필요하다. 하지만 분열을 막기 위해 다른 분열을 조성하는 방법은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너’, ‘나’가 아닌 ‘우리’란 이름은 ‘그들’이란 존재로 비로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 또한 자유주의의 진수(眞髓)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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