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2021년 정오 즈음에
[칼럼] 2021년 정오 즈음에
  • 이슬기 차장
  • 승인 2021.06.06
  • 호수 1532
  • 7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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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기<SBS 홍보팀> 차장

‘엄마, 여자친구가 생겼어요. 여친이 엄마한테 얘기하래요’ 16살 아들이 수줍게 말을 꺼냈다. 사춘기의 예민함이 먼저 발동했던지 그 글 안에서도 수줍음이 퐁퐁 흘러나왔다. 엄마는 메시지 수신과 동시에 이별로 받을 상처가 걱정되기까지 하는 재빠른 상상의 뇌회전 단계에 접어들었다. 아이와 부모의 삶이 오버랩되는 순간이고 인간이 성장하고 독립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필자의 과거를 돌아보면 처음 이성친구가 생기던 순간, 집을 떠나 혼자만의 생활을 시작한 시기, 그리고 결혼과 이혼, △사랑 △임신 △죽음 △출산 등은 생활과 사고의 분수령이었다. 통계전문사이트 ‘스타티스타’가 전 세계 유저들 20만 명을 대상으로 인생에서 생기는 사건들의 스트레스 레벨에 관한 조사를 한 결과 임팩트 지수 레벨 상위 스트레스 사건은 사랑하는 사람(배우자)의 죽음, 이혼, 가족의 죽음, 질병, 결혼, 부부갈등, 정년퇴직, 가족의 건강, 임신 순으로 나타났다. 짐작건데 전 세계 모든 인구는 만남과 헤어짐의 경험을 기반으로 자신의 현재와 미래에 적용하는 일종의 PTSD를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아는 건 미래에 영향을 미칠 것이 확실한 과거의 경험뿐이며 현재를 살아가야 하므로 끝없이 불안하고 나를 의심한다. 시공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불안한 인간으로 구성된 사회는 서로의 인생이 이어지는 각각의 알파와 오메가이고 처음과 끝이 이어지는 삶들의 집합체다. 인생의 등장인물들과 이벤트들이 관점과 상호작용에 따라 나열될 뿐이다.

학교와 사회에서 많은 천사와 악마를 인생에 들이고 내보내며 불안한 알파와 오메가의 간극을 걸어갈 모두에게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현재를 존중하고 어떤 사랑도 기록되지 말기를 바라본다. 사람에도 일에도 진심을 다하되, 내 삶의 서 말 구슬 같은 사건들을 꿰어나갈 실은 온전한 나의 실이어야 한다. ‘나’를 축으로 마음에 세우지 않으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 기록하며 아파하거나 친구에게 베푼 선의가 돌아오지 않음이 서운하고 누군가의 한마디가 심장에 기록돼 평생의 이명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내 실을 타인에게 넘겨주거나 잘못 매듭이 지어지면 다음 구슬을 꿸 수 없다.

이혼 후 ‘왜?’라는 질문과 ‘나에겐 괜찮은데 회사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충고를 가장 많이 들었다. ‘왜?’라는 질문엔 한두 가지로 답을 주기 힘들었고 딴 데 말하지 말라는 충고는 오랜 맘고생 끝에 내린 나의 결정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위로인지 우월감에 대한 확인인지 모를 반응들이 오가는 과정에서 자존감도 떨어지고, 자책하기 시작했다. 타인인 자식을 나와 분리된 인격체로 구분하지 못했고 획일화를 원하는 사회적 편견을 기록한 것이다.

나의 실을 찾지 못했다. 때론 커다란 구슬에 정신을 빼앗겨 나의 실을 놓기도 했다. 엄마의 엄마인 내 할머니 정도의 인생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지금 서 있는 여기쯤은 나에겐 생의 한가운데일 것이다. 또 한 해의 정오이기도 하고, 팬데믹의 정오일 수도 있다. 니체는 ‘삶의 정오를 휴식 욕구가 엄습해 오는 순간, 눈을 뜨고 있는 죽음, 모든 것이 정지되는 거기서 인간은 전에 없던 많은 것들을 본다’고 말한다. 로빈슨 크루소는 바다를 바라보길 멈추고 현재를 기록하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을 때 배에서 가져온 보리 씨앗에 튼 싹을 발견한다. 자신을 먼저 기록하고 그것이 축이 돼 삶의 곡점이 엄혹하지 않고 풍부한 정오가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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