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 과학기술 헤쳐보기
인문학으로 과학기술 헤쳐보기
  • 한대신문
  • 승인 2006.09.24
  • 호수 15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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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욱<인문대·철학> 교수

우리학교 인문대학 역사철학부 1학년들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성격의 과목을 1년 동안 이수해야 한다. 각각 “철학이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인가?” (1학기)와 “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역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 (2학기)로 명명된 이 과목들은 다소 딱딱한 느낌을 주는 철학개론이나 사학개론이 아니다.

이 과목은 고등학교에서 다양한 책을 비판적으로 읽고 분석하여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는 능력을 키울 기회를 갖지 못했던 1학년생들에게 그러한 인문학적 훈련을 시킬 목적으로 마련됐다.

물론 대부분의 학생들이 논술준비를 위해 다양한 주제에 대해 짧은 글을 읽고 전형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는 데는 익숙해져 있다. 또한 ??과학혁명의 구조??처럼 유명한 책은 반 페이지 정도로 간결하게 정리된 요약문의 형태로 접해 본 적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대학에서 진지한 책을 읽고 인문학 수업을 따라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이러한 훈련을 시키도록 특별 과목이 마련된 것이다.


이 수업을 하다보면 일찍이 C. P. 스노우가 ‘두 문화’의 문제라고 이야기했던 현상이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심각한지를 절감하게 된다. 매주 읽는 책의 목록은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기술, 예술 등의 여러 장르를 골고루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학생들이 유독 과학과 기술과 관련된 책에 대해서는 왜 역사철학부 학생이 이런 책을 읽어야 하느냐는 반응을 보이기 일쑤이다. 재미있는 점은 그 친구들이 책 내용을 재미있게 읽고 어렵지만 나름대로 생각할 거리가 있었다고 느낄 때조차 그런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철학함이란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을 포괄하는 넓은 지식의 체계에 대해 균형잡힌 안목을 가지고 각각의 분야를 정합적으로 통합하는 것이므로 자연과학도 당연히 철학적 소양교육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설득하면 어느 정도 공감은 하면서도 여전히 완전히 납득하지는 않는 눈치다.

만약 그런 이유라면 최근 산업문명의 발달로 인해 환경오염 문제가 심각해졌다든지,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개인감시와 프라이버시권 침해의 가능성이 생겼다든지 정도로 사실만 알면 되지, 구태여 환경호르몬의 발견과정이나 그것의 구체적인 인과작용 등을 시시콜콜 알아야 할 필요가 뭐가 있냐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과학기술에 대해 인문학적으로 사유하기 위해서는 TV 뉴스 프로그램이 정리하는 수준의 내용만 알면 된다는 이런 식의 생각이 실은 과학기술과 인문학 사이의 생산적인 지적 교류를 가로막는 큰 장애물 중 하나다. 언젠가 학생들에게 읽혔던 대기오염에 대한 책에 대해 상당 수 학생들이 책을 안 읽고 와도 할 수 있는 이야기만 했다.

대기오염은 심각한 문제이므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그 책에는 대기오염이 왜 심각한 사회문제로 인식되기 어려웠는지를 역사적으로 설명하면서, 대기오염의 피해가 자동차 사고처럼 즉각적으로 나타나고 가해자가 누구인지가 비교적 분명하지 않고,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나타나며 나중에 질병이 발생하더라도 그 질병이 대기오염 ‘때문엷 발생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어렵다는 점을 들어 지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차이점이 결국 미국 법정에서 받아들여지기 위해 보건의학의 표준적인 통계적 추론방식이 어떤 방식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는지도 알려준다. 이런 내용은 대기오명에 대한 깊이있는 인문학적 논의를 위해서는 반드시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내용이다.

이런 내용을 인문학자가 알아서 뭐하느냐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전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서만 찾아볼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사람만 있는 나라에서는 대기오염에 대한 법적 규제가 성공적으로 입안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처럼 과학기술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은 단순히 과학기술의 폐해를 지적하고 비난하거나, 그래도 현대사회에서 과학기술의 사용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체념하는 식의 단순한 이분법을 벗어나 인문학의 여러 분석도구를 사용하여 과학기술의 구체적인 내용을 샅샅이 헤쳐보고 뒤집어보면서 균형잡힌 평가와 대응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두 문화’ 문제가 유독 심각한 우리나라에서 이런 시도는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런 깊이있는 성찰이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출범할 인문대학의 과학기술학(STS: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전공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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