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한대신문 문예상 시 우수상] 동굴
[2020 한대신문 문예상 시 우수상] 동굴
  • 최승욱<인문대 국어국문학과 18> 씨
  • 승인 2020.11.30
  • 호수 1522
  • 9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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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최초의 은유가 동물이었다면, 그것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본질적인 관계가 은유적이었기 때문이었다.
- 존 버거 -


불을 끄면 벽에 그려진 동물들도 눈을 감는다. 종종 그는 그들의 꿈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꿈에서 그는 사슴의 힘줄을 끊는 사람이었고 하마
의 뒷발에 갈비뼈가 부러지는 사람이었다. 풀숲 사이로 사라지려는 땃쥐
의 꼬리를 밟거나 설원에서 들개무리를 만나 갈기갈기 찢긴 사람이었다.

이빨에 뼈가 부딪히는 소리
붉게 물든 설원에서
눈이 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었다.

죽이고 죽는 일은 이렇게
조용하구나
깨닫는

"사자가 암소의 목을 자신의 강력한 턱으로 부러뜨리고는, 암소를 갈기
갈기 찢어 피와 내장을 먹어치우는 동안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목동들과
개들은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거리를 유지한다"* 
그는 오래된 은유를
믿는다. 잠에서 깬 그의 심장은 사자처럼, 암소처럼 뛰고 있었고 그는
그것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다시 그는 벽에 동물 그림을 그린다. 하나의 색으로 테두리를 그리고
면을 채우고. 이것은 사슴의 다리. 저것은 들개의 이빨. 꿈에서 보았던
모습들을 떠올리며

그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다분히 종교적이다. 하나의 색으로 가능한
한 정확하게 그리려 노력한다. 암소의 꼬리. 사자의 발톱. 쩍 벌어진 턱
과 옆구리에서 흐르는 피와 침.

하얗게
드러난 자신의 갈비뼈를 마지막으로 칠하고 그는 다시 잠에 든다.
꿈에서 그는 자신이 그린 그림들에 둘러싸인 사람이었다. 팔과 다리의
각도가 어색하구나. 얼굴이 조금 더 클 필요가 있다. 그는 생각한다.
일어나서 그 부분들을 고쳐야겠다고 생각한다.

누구의 꿈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일리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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