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고라] 오늘날, 아름다움으로 기억되길
[아고라] 오늘날, 아름다움으로 기억되길
  • 맹양섭<문화부> 정기자
  • 승인 2020.09.28
  • 호수 1518
  • 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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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양섭<문화부> 정기자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思念)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왔기에 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시인 김광균은 본인의 시 「와사등」에 도시감수성과 문명비판적 지성을 드러냈다. 이 시는 고층을 묘석으로 직유해 도시의 불모성을 지적하고, 행렬에 섞인 시적 화자가 군중 속에서 느끼는 고독과 비애를 표현했다. 필자는 고등학교 2학년 문학 시간에 「와사등」을 주제로 발표했다. 가스등의 등장에 심신산란(心神散亂)을 비유한 「와사등」은 대한 제국 이후 우리나라가 일제의 치하에 놓여 서양 문물이 들어오던 시기를 역설했다. 특히 김 시인은 우리나라가 본연의 모습을 잃어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작품으로 창작한 것이다. 이를 공감했던 고등학교 2학년 이후 필자는 기술의 낯섦을 경험하고 있다.

지난해 필자는 수능이 끝나고 떠난 친구들과의 여행에서 기술의 편리함을 체감했다. 처음 사용한 ‘삼성페이’로 여행경비를 관리할 수 있었다. 또 지리를 모르는 필자가 ‘네이버 지도’ 앱을 이용하는 친구를 따라 사용하게 되면서 더는 거리의 사람들에게 길을 묻지 않아도 됐다. 매표소에서 승차권을 구매하던 경험도 휴대전화가 발달하면서 추억이 됐다. 이런 기술들이 이제 우리나라의 일상에 녹아들고 있다.

기술에 문외했던 필자가 정보를 받아들여 기술을 사용하는 것처럼 오늘날 기술은 재산과 정보가 부유한 자들이 독점하고 있다. 기술의 발달에 관한 기사를 써가는 와중에도 소외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이번 코로나19 방역조치에 따라 스마트폰을 통한 전자출입명부 작성이 방역의 편리함을 꾀하면서도 디지털 소외를 부른 것처럼 말이다. 지난 18일 중년 남성이 서울역 근처 프렌차이즈 식당에서 휴대전화가 없다는 이유로 음식을 먹지 못한 채 가게를 나가야만 했다. 이를 목격한 김윤영<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은 “노숙하는 장소나 주로 이용하는 지원기관의 이름을 남기는 것처럼 약자에게 늘 선택지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정부가 쏘아 보낸 방역지침이 소외계층에게 향하는 화살이 된 순간이었다. 기술이 차별을 불러오지 못하도록, 우리가 기술의 발달에 대응해야 하는 이유다.

방역의 사례처럼 기술의 발달은 분명 우리의 삶을 이롭게 하곤 있다. 이런 사유는 변모한 자연의 일상에 기술을 안착시켰다. 더욱이 코로나19는 디지털 시대로의 기술 진입을 부추긴다. 발달의 옳음과 그름에 대한 철학적 사색은 의미가 없어졌다. 우리는 변모한 자연을 맞이해야 한다. 동시에 공존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역사로 기록될 아날로그 세대와 새로운 이야기를 전개하는 디지털 세대가 놓여있는 현재의 특이점에서 말이다. 유종지미(有終之美), ‘끝을 잘 맺는 아름다움’. 이 말뜻처럼 오늘날 변모한 자연에 대처해서 모두가 아름다움을 꿰차고 나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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