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곶매] 고려인과 만난지 1주년, 필자가 배운 삶의 태도
[장산곶매] 고려인과 만난지 1주년, 필자가 배운 삶의 태도
  • 이예종 편집국장
  • 승인 2020.08.31
  • 호수 1515
  • 7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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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예종<편집국장>

필자는 지난해 늦여름을 또렷이 기억한다. 조판하는 오늘처럼 태풍이 오는 날은 아니었고, 또 코로나19 때문에 답답하던 때도 아니었다. 동대문 골목 허름한 치킨집에서, 닭 튀기는 냄새와 담배 태우는 냄새가 섞인 바람을 쐬러 나오는 길에 취재는 시작됐다.

두 손 가득 시커먼 비닐봉지를 들고는 핸드폰을 어깨에 올려놓고 고개를 왼쪽으로 꺾어서 기행스럽게도 움직이는 중년여성이 눈에 들어온다. 눈에 들어오기 전에 먼저 귀에 들렸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겠다. 생소한 언어로 떠들며 지나가는데 생긴 것은 몹시도 한국인인지라, 필자는 바삐 지나가는 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리로 ‘어디 나라 말이지?’를 뱉어버렸는데, 옆에 있던 지인이 ‘고려인’일 것이라 알려준다. 단어가 ‘조선족’과 비슷해 ‘비슷한 사람들인가?’라고 반문하니, 옛날 일제강점기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사람들이란다.

그렇게 나에게 고려인이라는 새로운 존재가 각인되고, 그에 맞춰 흥미도 드러났다. 취재는 곧바로 시작됐다. 우리 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을 첫 번째 인터뷰이로 만났다. 필자에겐 어린 기자정신이 있어서 고려인의 어려움을 보여주고 자연스럽게 지원의 필요성을 환기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야 한다’는 정해진 답을 강요하려 굴었다. 잘 적응하고 살아가는 이에게 ‘어떠세요?’가 아닌 ‘불편하죠?’라 묻고 있는 필자였다. 다행히도 함께 동행한 지인이 상황을 이해하고 적절히 질문을 끊어줬다. 방해 아닌 방해(?)에 정신을 차려보니 이야기를 그대로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듣고 싶은 말을 듣기 위해 취조하는 사람처럼 굴고 있는 모습이 비쳤다. 과격하리만큼 급한 마음이 내가 혐오하는 ‘기레기’의 모습으로 나를 이끌 뻔했다.

그 다음에 만난 인터뷰이는 허름한 골목에서 고려인 쉼터를 운영하고 있는 이원용 박사였다. 국가 지원도 미미해 쉼터라고 해봐야 반지하에서 운영하는 일종의 ‘학당’같은 느낌이 강했다. 쉼터 바깥 길가에서 이 박사를 만나 이야기하고 있는데, 필자와 대화하는 도중에도 근방에 살고 있는 고려인 주민들과 끊임없이 러시아어로 유창하게 대화하곤 했다. 필자가 들을 수 있는 말은 겨우 ‘스파시바’뿐이었지만, 대화하는 그들의 얼굴을 보면 이 박사가 고려인들로부터 ‘감사함’을 많이 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인터뷰이가 한창 러시아어 공부를 할 때는 ‘노어노문학’이 한참 떠오르던 시기라 교수까지 노려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왜 굳이 이 길을 선택했을까. 이 박사는 러시아 유학길에서 어눌한 한국말로 자신이 우리나라에서 일했었음을 소개하는 현지인을 만났다고 한다. 자신의 할머니를 고려인이라 설명하는 통에 이 박사도 필자와 같이 일말의 흥미를 느낀 듯 보였다. 그리고 그 흥미가 그를 여기까지 이끌었다고 한다.

아직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문하곤 하는데, 추정해본다면 그냥 살아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밌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결단코 성취하기 어려운 것이 있는가 하면, 별다른 의지가 없어도 짜여진 각본처럼 움직여지는 경우도 생각 이상으로 많기 때문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곤 하는데, 답해본다면 그냥 무엇이든 하는 것이다. 자신은 비루한 옷을 걸치고 고려인들에겐 정성스럽게 우리의 언어와 문화를 가르쳐서 민족의 정기를 입혀주는 사람의 위대한 면모는 거창한 계획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극히 작은 곳에서 피어났기 때문이다.

작은 민들레 홀씨를 보는 마음처럼, 작다고 지나치거나 문대면 영영 자라지 않고, 작아도 소중하게 돌보면 처음을 잊을 정도로 아름답게 자라난다. 무엇이든 천천히 그리고 아주 미미하게 나아가는 ‘시나브로’의 정신이 필요한 것이다. 언젠가 꽃피울 그날이 무엇이든 조용히 바라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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