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터질 고름이 터졌다. 택배 기사의 눈물
결국 터질 고름이 터졌다. 택배 기사의 눈물
  • 이세영 기자
  • 승인 2020.05.24
  • 호수 1512
  • 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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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입사한 지 한 달도 안 돼 배송 중 쓰러진 ‘쿠팡맨’ A씨. 그는 1차 배송을 오전 3시까지 마친 뒤 오전 7시까지 2차 배송을 끝내야 했지만, 오전 1시 30분 그의 배송은 멈췄다. 결국 사망한 A씨는 생전에 유족들에게 ‘배송 중엔 밥도 못 먹고 화장실도 가기 어렵다’며 열악한 근무환경을 호소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지난해 1월에도 택배 기사 B씨는 퇴근하고 집에서 잠이 든 뒤 일어나지 못했다. 전국택배연대노동조합은 회사가 장시간 노동을 강요한 결과 과로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택배 기사 과로사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듯 매년 끊이지 않고 터져 나오고 있다.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환경
끊임없이 택배 기사들의 과로사가 발생하는 이유는 △살인적인 노동환경 시스템 △주된 업무 외 추가 노동 요구 △법정근로시간에서 벗어난 근무시간 △법적으로 제한된 노동자로서의 권리가 있다. 

적정 업무량 표준이 없는 노동환경 시스템은 택배 기사들을 더 고통스럽게 한다. 대부분의 택배사는 노동자가 일한만큼 돈을 지급하는 합리적인 시스템이 아닌 장기간 고된 노동을 방치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김한별<전국공공운수노조 공항항만운송본부> 조직부장은 “택배 기사 간 경쟁을 유발하는 평가 제도 등이 살인적인 노동환경을 초래한다”며 “택배 회사에 소속된 정규직 노동자의 경우 안정적인 임금과 고용 보장을 위해 택배 기사들은 무급노동, 조기 출근, 휴게시간 반납 등을 감내한다”고 전했다.

특히 택배 기사들이 주요 업무 외 추가 노동을 무급으로 부담하는 문제는 과로의 원인이 된다. 지난해 CJ대한통운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 약 5만여 명의 택배 기사 중 95%가 과다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과다 업무의 예시로는 분류 작업이 있다. 택배 기사는 소비자에게 물품을 배송하는 것이 주 업무지만 집화하기 전 알맞은 택배를 분류하는 사전작업에 부당하게 투입되고 있다. 일부 택배 노동자들은 새벽에 출근해 정오 무렵까지 택배물을 분류하는 작업을 진행한 뒤 오후에야 배송을 시작한다. 월급이 아니라 건당 수수료를 받아 ‘개인사업자’로 취급되는 택배 기사들은 택배물 분류 작업이 대가 없는 ‘공짜 노동’이라는 입장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진택배 기사 C씨는 “자신이 해야 하는 업무로도 충분히 바쁜데 분류 작업까지 직접 하려니 매우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전했다. 김 조직부장은 “회사가 택배 분류작업 전담인력을 채용해 택배 기사의 노동시간을 근본적으로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택배 기사들은 법정근로시간을 보장받지 못한 채 근무를 하기도 한다. 지난해 한국교통연구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택배 기사는 △일평균 12.2시간 △월평균 25.6일 △주평균 76.88시간 일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주 52시간 근무제로 법률이 개정됐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이 일하는 시간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전국택배연대노조는 2018년부터 ‘장시간 노동은 긴 분류 작업 때문이며 별도의 인력을 선발해 분류 작업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며 장시간 노동 개선을 촉구하고, 주 52시간 근무와 휴식권 보장 등 노동환경 개선을 주장하고 있다.

택배 기사들은 법마다 노동자로 인정되는 범위가 달라 노동권을 온전히 보장받기 힘든 실정이다. 최근 서울행정법원은 최초로 노동조합법상 택배 기사를 노동자라고 판결하며 택배연대노조 또한 노동조합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택배 기사는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특수형태근로종사자’로 배송 업무 중 택배 차량·오토바이 사고가 발생하거나 배송 상품 분실 시 본인이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등 업무 중에 발생한 사고에 대해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택배 기사들은 근로기준법상으로도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해 근로기준법 내 규정된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보장받기 매우 어렵다.

제대로 된 보호 장치는 아직
이들은 소비자를 위해 매일 수많은 물량을 빠르게 배송하지만 휴식시간도 제대로 보장 받지 못한 채 일하고 있다. 더욱이 이들을 위한 법적, 사회적 보호 장치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택배 기사들의 노동 환경개선을 위해 국토교통부(이하 국토부)는 지난달 택배업계 간담회를 개최하고 택배업계 종사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권고사항을 발표했다.

국토부에 따르면 우선 각 택배회사 영업소가 택배차량과 택배 기사를 늘려야 한다. 차량 또는 인원 충원이 어려울 경우, 택배차량에 동승해 물품을 운반할 보조인력을 채용토록 했다. 또한 택배 업무의 적정 근무량 체계도 마련할 것을 권고했다. 이는 택배 기사의 물량을 배정할 때 △건강 상태 △근무 기간 △업무 숙련도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택배 기사들의 휴식시간을 충분히 확보해줘야 한다는 점도 권고했다. 국토부 관계자는 “택배 기사 역시 일일 휴식시간을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며 “하루 배송 물량이 많으면 평소 배송기일보다 1~2일 지연해 물량을 나눠서 배송하는 방식으로 휴식시간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위와 같은 국토부의 권고사항이 마련됐음에도 현장 노동자는 이를 체감하진 못하고 있다. 현장에서는 위 사항이 시행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C씨는 “국토부 권고사항 시행 전과 후의 근무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며 “국토부의 권고사항이 시행되고 있는지는 아직까지 실감할 수 없었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실질적인 개선을 위해서
그렇다면 실효성 없는 권고사항이 아니라 실질적인 개선을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택배 기사를 노동조합법상만의 노동자가 아닌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도 인정해 그들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실제로 배송대행업체와 위탁계약을 맺고 일하는 배달대행 노동자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라는 판결이 노동자의 권리 증진으로 이어진 사례가 있다. 고용노동부는 배달대행 노동자가 지정 장소로 출퇴근 및 업체의 배달대행 노동자 관리·감독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근로자로 인정했다. 이들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받음으로써 △연장근무 △유급휴가 △퇴직금 등을 받을 수 있고, △근로시간 제한 △해고 제한 △휴게시간 보장 등 근로기준법이 정한 노동자 보호 조치를 누릴 수 있다. 

정부의 조치와 더불어 택배사의 역할도 중요하다. 김 조직부장은 “코로나19 사태가 심화됨에 따라 택배 기사들의 존재가 부각됐다”며 “모두가 대면 접촉을 피해야 할 때 대면 접촉이 불가피한 택배 기사들의 권리와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정책들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덧붙여 김 조직부장은 “사각지대에 놓인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위해서는 기업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소비자가 편리하게 배달 서비스를 누릴 때 그 뒤엔 택배 기사들의 노고가 존재했다. 해외에서도 극찬하는 우리나라의 빠른 배송과 새벽 배송 시스템은 사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는 택배 기사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서비스다. 나날이 빨라지는 배송의 편리성을 유지하려면 배송 노동자의 여건부터 개선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 과로를 강요하고, 노동 기본권을 침해하는 택배 기사들의 노동환경은 조속히 개선돼야 할 필요가 있다. 

도움: 김한별<전국공공운수노조 공항항만운송본부> 조직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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