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조차 없는 아이들의 노동환경
‘기본’조차 없는 아이들의 노동환경
  • 정채은 기자
  • 승인 2020.04.12
  • 호수 1508
  • 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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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MBC 「뉴스데스크」가 ‘CJ ENM’의 갑질 및 출연자 인권 침해 문제를 보도하면서 Mnet 프로그램 「아이돌학교」출연자들이 겪은 참담했던 노동환경이 세상에 알려졌다. 더욱이 위 프로그램 출연자 40인의 평균연령은 약 18세로, 성장기의 청소년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기본적인 의식주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했던 것으로 밝혀져 공분을 샀다. 또한 지난달 3월에 방영된 TV조선 프로그램 「미스터트롯」에서도 청소년 출연자로 인해 논란이 일었다. 15세 미만 청소년이 출연한 생방송이 자정을 넘기면서 방송심의위원회에 민원이 제기된 것이다.
 

아동·청소년 촬영환경의 민낯
‘공익인권변호사 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등으로 구성된 시민단체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 노동인권 개선을 위한 팝업’은 지난 1월 국회에서 토론회를 열었다. 이들은 드라마 제작 현장에 있는 6~19세 아동·청소년 103명을 대상으로 한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의 노동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아이들의 촬영 현장을 면밀히 검토했다. 

대기시간을 포함한 촬영 시간을 묻는 질문에 ‘12시간 이상~18시간 미만’이라고 답한 비율은 36.9%(38명)로 가장 많았고, ‘18시간 이상~24시간 미만’도 21.4%(22명)나 됐다. 야간촬영 참여 여부에 대해서는 전체 응답자 가운데 68.96%(70명)가 ‘참여해봤다’고 응답했고, 그중 절반 이상은 야간촬영 참여 여부와 관련해 ‘특별한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장시간의 고강도 촬영 속에서 아동·청소년이 감당했을 노동의 무게는 경험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들에 대한 복지 문제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드라마 촬영 시 △한여름 무더위 △한겨울의 강추위 △숨쉬기 힘든 미세먼지 등 악천후 시에도 촬영을 진행한 경험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70%에 육박했고, 그중 ‘아무런 준비 없이 촬영이 강행됐다’는 응답이 절반 이상으로 높게 나타났다. 

아동·청소년 시기 촬영 활동은 이후 이들의 연예인이라는 꿈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기에, 부당한 대우를 받더라도 쉽게 이의 제기를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아이들은 묵묵히 버텨야 할 뿐이다. 혹자는 이를 이용해 아동·청소년을 착취하고, 단지 ‘상품’으로써 이들을 소비하고 있었다. 
 

‘효력 ZERO’ 규제
방송가 아동·청소년 인권 문제 논란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아동·청소년 방송 출연의 문제점과 개선방안 마련의 필요성은 국회 입법조사처에 의해 2003년부터 제기됐다. 그 후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관련 내용을 입법할 분위기가 조성됐고, 2014년 미성년 대중문화예술인의 보호 조항이 포괄적으로 규정된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이하 대중문화발전법)이 제정·시행됐다.

대중문화발전법에 따르면 청소년의 방송 활동 시간을 규정하고 △수면권 △학습권 △휴식권 등 권리를 보호하도록 하고 있지만 강제성은 없다. 김두나<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대중문화발전법은 ‘~해야 한다.’ 식의 선언적인 규정에 불과한 것”이라며 “구체적인 기준이나 위반 행위에 대한 처벌 규정이 모호해 실효성이 없고, 현재는 거의 재량에 맡기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성상민<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기획차장도 “알더라도 무시하면 그만인 법”이라고 꼬집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촬영 현장에서 유명무실한 법과 제도의 우선순위는 한없이 뒤로 밀리고 있다.
 

우둔한 촬영장 인권 감수성
촬영 현장에 만연한 낮은 인권 의식도 문제다. 성 기획차장은 “인권 문제는 방송가 전반에서 제기되는 문제지만, 특히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더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어른에게 지시하는 것과는 다른 섬세함이 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에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방송가 전반에서 노동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조차 잘 지켜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성 기획차장은 “제작사 또는 에이전시와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 사이에 계약서가 없거나 단순히 구두로 끝내는 경우도 많다”며 이는 “방송 제작환경이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을 근로자로서 존중하고 있지 않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 가려져 있던 한없이 초라한 아동·청소년 노동 현장의 단면을 보여준다.
 

실제 촬영 현장을 담는 법의 필요성
아동·청소년의 노동환경이 개선되기 위해서는 허무맹랑한 글자뿐인 법이 아닌 실제 프로그램 제작 현장에서 작동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노력이 절실하다. 김 변호사는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의 기본권 보장을 위해서는 이들의 연령에 따른 성장·발달 단계, 재학 여부 등을 고려해 기준을 보다 세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현재는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의 연령을 15세를 기준으로 나누고 있지만, △영·유아 △미취학 아동 △취학 중인 아동 등 연령별 특성에 맞는 구체화된 규정을 신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덧붙여 김 변호사는 “촬영현장에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의 △보건 △복지 △안전 △인권 등을 감시하는 전담 인력 배치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또한 김 변호사는 “예리한 시청자들의 문제제기로 많은 관행이 바로잡아지고 있는 만큼 아동·청소년 노동환경 문제에서도 우리 모두 적극적인 감시자가 돼야 한다”며 시청자의 역할도 강조했다. 

드라마, 영화뿐만 아니라 미디어 매체의 다양화로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은 더욱 늘어났고, 연령층 또한 다양해졌다. 많은 아이들이 연예인의 화려한 모습을 선망하며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이 몸담는 노동환경은 여전히 낡고, 위험하다. 그 어느 때보다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의 활약이 활발한 요즘, 이들이 포함된 프로그램 제작환경도 하루빨리 안전해지고, 건강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도움: 김두나<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
성상민<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기획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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