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길 위에서 길 찾기
[취재일기] 길 위에서 길 찾기
  • 이예종<대학보도부> 부장
  • 승인 2020.03.15
  • 호수 1507
  • 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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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종<대학보도부> 부장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하는가?’, ‘일하고 있네’, ‘잘해보게’,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 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네’, ‘조르바 잘해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카잔차스키가 그린 조르바는 항상 이렇게 자문하면서, 당장 하고 있는 행동 외에는 어떤 생각도 일절 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르바는 부모의 돈을 훔쳐 버찌를 사고, 구역질이 나올 때까지 집어삼키고 나서야 버찌에 대한 미련을 저버릴 수 있었던 사람이다. 책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가 독자에게 전하는 말은 무엇일까. 모든 것을 열렬히 쏟아붓는 몰입이 지난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만약 자유를 ‘선택’에 관한 것으로 한정한다면, 우린 선택하고, 몰입해 모든 에너지가 소진되고 나서야 스스로 한 선택에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서 선택에 대한 미련과 집착은 자연스레 없어지고 새로운 선택에 다시금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길을 걷다 다른 길로 새지 않고 끝까지 완주하면, ‘계속 걸어볼걸’이라는 후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한대신문에 들어와 동행하는 이들을 만났다.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간 사람도 있었다. 길을 다 걷고 새로운 길로 나아간 사람도 있다. 물론 걸어온 길은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그렇다고 불행하지만도 않았다. 뒤에 서 있을 때도, 앞에 서 있을 때도 있었다. 결국 이 길을 걷다 보니, 필자가 향하고 있던 목적지를 다시 정리해볼 수 있었다.

필자는 왜 기자를 꿈꾸고 한대신문에 들어왔는가? 몇 년 전, 소방관이 염소농장에 있는 벌집을 제거하던 도중 실수로 불이 건초더미에 옮겨붙은 사건이 있었다. 기사에 따르면 ‘소방서 추산 피해액은 100만 원이지만 농장주는 천만 원을 배상비로 소방관에게 요구했으며, 소방관은 배상비를 채우기 위해 적금까지 깼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가 직접 확인한 결과 농장주는 ‘자신은 보상을 요구한 적이 없고, 피해액 자체도 천만 원을 상회하고도 남는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분명 거짓말을 하는 상황이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소방서 추산에 따라 농장의 피해 범위가 아파트 단지 넓이라는 점, 기자들이 농장주에게 반론권조차 주지 않았다는 것과 대중들이 10초 남짓한 시간 동안 써 내린 댓글에 농장주는 인격살인을 당했다는 점이다. 반론권조차 없는 보도를 보면서 필자는 보도와 진실이 다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목격했다. 기자정신의 기본을 깨닫게 된 그 시점으로부터 필자는, 독자가 아닌 기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혹자는 대학신문과 종이신문이 몰락의 장에 들어선 지 오래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필자는 왜 한대신문에 남아있는가? 이 몰락의 장 속에 한 번 들어와 현실에 제대로 마주할 수 있고, 온 힘을 다해 저항해봐야 후회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더 잘해볼걸’이라는 미련이 남는 것보단,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는 것이 차라리 나은 것이다.

카잔차스키는 속박되지 않는 것이 자유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마 그는 필자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열렬히 잠겨보고, 그 후에 포기하라고” 필자는 아직 잠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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