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한대신문 문예상 소설 부문 대상] 흐르는 소리
[2019 한대신문 문예상 소설 부문 대상] 흐르는 소리
  • 정주엽<인문대 사학과 18> 씨
  • 승인 2019.12.02
  • 호수 1505
  • 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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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끼익 끽 끽높은 데시벨의 쇳소리가 길고도 아득하게 터널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열차와 선로가 만들어내는 철컹 철컹이라는 기분 좋은 합주곡은 온데간데없이, 지하철이 선로와 미끄러지며 내는 날카로운 음성이 승객들의 귀청을 때리고 있었다.

소리가 멈췄을 때는 터널을 빠져나가기 직전이었다. 터널을 통과하고, 햇빛이 들어오는 순간, 한강이 펼쳐졌다. 밖의 하늘엔 저녁노을이 가득했다. 유진은 이런 해거름의 한강을 좋아했다.

선연한 햇살과 파란 강물, 높은 채도의 물질들

유진에게 한강은 그런 곳이었다. 지하철은 어느덧 한강철교를 지나고 있었다. 63빌딩의 누런 유리창에는 강의 물결과 초목이 가득했다. 누런 창문은 마치 브라운관 TV처럼 해 질 녘 한강의 모습을 생생히 중계하고 있었다. 유진은 그 모습을 무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63빌딩이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지기 직전, 창엔 구름의 모습이 떠올랐다. 유진은 그 구름을 끝까지 보기 위해 벌떡 일어나 지하철 끝자리 창문에 얼굴을 붙여봤지만, 구름은 그 가녘의 모습만 설핏 드러낸 후 자취를 감췄다.

유진은 다시 자리로 돌아왔지만, 환승역을 막 지났기 때문인지 그 자리엔 누군가 앉아 있었다. 별수 없이 유진은 손잡이를 잡고 서서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고 블루투스로 휴대폰과 연결했다. 포스트 말론의 노래가 유진의 나팔관을 둥둥 두드렸다.

한참 지나서였을까. 노래의 규칙적인 리듬을 깨고 목소리가 하나가 툭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하고 이어폰을 빼보니, 그녀 바로 앞에 앉은 이의 휴대폰에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청취자 여러분들 반갑습니다. 20OO11OO일 오늘 방송 시작합니다......”

소음을 일으킨 남자는 임산부석에 앉아 고개를 떨며 졸고 있었다.

천하태평이구먼.’ 유진은 생각했다.

휴대폰 구멍에 이어폰 단자가 반쯤 연결된 걸 보니, 고의는 아닌 듯했지만, 여러 추태를 보아 몰지각한 인물임은 분명했다.

이걸 깨워 말아?’ 유진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유진은 주위를 둘러봤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어폰을 낀 채 자신의 휴대폰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어폰에서 해방된 날 것의 청력 기관을 가진 몇몇 이들의 표정에서 짜증의 기운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소음의 당사자에게 말을 걸 배짱은 없어 보였다.

유진은 다시 고개를 돌려 소음 유발자의 휴대폰에서 들리는 목소리의 정체를 살폈다. 좀 더 귀를 기울이자 독특한 목소리의 파동과 울림이 느껴졌다.

“OO님이 보내주신 사연 잘 읽었습니다.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그 남자가 들으며 졸아 버린 소음의 정체는 다름 아닌 ‘VAS’로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다. ‘VAS’Voice Assistance System의 약자로 국내 스타트업에서 개발한 음성 보조 시스템이었다. 목소리를 30초 정도 녹음한 파일을 VAS의 서버에 적용하면,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목소리를 변형하는 것이 가능했다. 특히 목소리의 음역을 조절해 중성적인 목소리로 바꿔주는 기능부터 원하는 연예인의 목소리로 책을 읽게 하는 TTS(Text To Speech) 기술에 이르기까지 VAS는 다양한 분야에 활용됐다,

이렇듯 지금은 VAS가 음성 기술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처음 VAS가 등장했을 때만 해도 전문가들은 기술의 실효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단순히 목소리를 변형하는 것이 음성변조와 무엇이 다르냐는 점에서였다.

그러나 VAS가 베타 버전으로 무료 배포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VAS의 다운로드 수가 100만을 기록하자, 전문가들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VAS의 인기는 유튜버와 같은 1인 크리에이터들이 발 빠르게 VAS의 혁신성을 받아들인 덕분이었다. 이들은 VAS를 활용해 유머, 시청자 소통, 라디오 같은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만들었고, 대중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흐르자 언론에서도 ‘VAS 기술이 우리에게 가져올 것이라는 제목의 특집 기사들을 써내며 VAS 기술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언론에는 VAS 기술을 만든 A사 대표 최 씨의 인터뷰가 자주 등장했는데, 그는 VAS 기술을 활용해 음성 변조를 한 전화 인터뷰에만 응했다. 그런 그는 VAS를 향한 대중의 열렬한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또한 최 씨는 곧 출시할 정식 버전에서는 더 발전한 기능을 선보일 것이라고 예고했다.

유진은 이런 VAS 열풍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한편으론 공감하는 면도 있었다. 그녀 역시 이런 VAS의 시혜자였으니 말이다. 그녀는 3년 동안 대기업 보험 회사의 콜센터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보험회사는 콜센터 상담원 처우를 개선한다는 목적으로, VAS 기술을 콜센터 업무에 전면 도입했다. VAS 기술을 통해 상담원들은 자신의 성별을 숨길 수 있었고, 신뢰감을 주는 크기 정도로 자신의 목소리를 보정할 수도 있었다.

이번 역은 xx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유진은 망상에 빠져 있다, 안내방송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리고 타는 많은 인파 속에 중심을 잡기 힘들었지만, 그녀는 열심히 몸싸움한 끝에 간신히 내릴 수 있었다. 지하철역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향하는 길 앞 횡단보도에서 유진은 신호를 기다리며 차분히 서 있었다. 그러던 중 옆에 있던 한 남자가 통화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누군지 내가 어떻게 알아?, 아 미안 자기였구나, 아니 VAS 모드로 하면 내가 못 알아채지. 아 말투로 짐작 못 하냐고? 관심이 없는 거라고? 아 왜 그런 식으로 말해, 그런 의도 아닌 거 알잖아?”

유진은 내심 웃었다. 당황하는 남자의 모습보다는 새로운 기술이 등장해도 연인 사이 전형적인 대화는 똑같다는 사실이 재밌었다. 새로운 것은 과거의 것들을 얼마나 바꿔놓는가. 유진은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하며 고향의 바다를 떠올렸다. 젊은 연인들, 싸구려 조개구이 그리고 조석(潮汐). 새로운 파도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오고 무엇을 앗아가는가.

집 앞 현관문에는 자장면 그릇이 신문에 쌓여 놓여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유진에게 가장 먼저 들려온 것은 TV 소리였다. 그리고 방바닥에 베개를 가랑이 사이에 태연히 끼고 운동복 차림으로 누워있는 윤지가 보였다. 유진은 먹다 남은 과자, 요구르트 같은 것들이 너절하게 놓인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아 좀 왜 쉬는 사람 미안하게 만들어, 있다가 내가 할게.”

윤지는 유진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귀도 잘 안 들리면서, 기척은 귀신같이 아네.’ 유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한 손으론 리모컨을 다른 한 손으로 과자 봉지를 들고 윤지는 TV 바로 앞에 앉아 있었다.

내가 너무 가까이서 보지 말라고 했잖아, 볼륨은 또 왜 이렇게 높였어? 아랫집에서 올라온다고.” 유진이 윤지 얼굴에 대고 소리쳤다.

아 거참 오자마자 잔소리네.”

뭐라고? 이게 다 너 걱정해서 하는 말이잖아. 너 이렇게 볼륨 높여서 들으면 청력에 더 손상 간다고, 병원에서 말했잖아.” 유진이 목청을 높여 외쳤다.

윤지는 들리지 않는 탓인지 유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변한 것이 없었다. 관계를 시작한 처음 1년을 제외하고 3년이 다 돼가는 지금까지 둘의 연애는 언제나 일방적이었다. 윤지가 유진의 말을 무시할 때마다, 유진은 이 관계의 끝을 상상하곤 했다. 도대체 너와 나라는 사람이 만난 이유는 뭘까. 이 지긋지긋한 연()의 실을 이제는 놓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유진은 이 연애를 쉽게 끝낼 수 없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극복하고 이뤄낸 사랑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가 윤지에게 가지고 있는 죄의식 때문이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유진과 윤지가 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 일이 없었다면 더없이 행복했겠지만....... 윤지는 그날 바다를 보러 가자고 했다. 유진의 고향, 인천의 바다를 가자고. 유진은 정말 기뻤다. 윤지와 사귄다는 것을 아버지에게 알린 뒤 한 번도 가지 못한 장소였다. 윤지는 친구에게 자동차까지 빌렸으니 유진은 몸만 오면 된다고 말했다.

유진아, 나 주유만 하고 다시 전화할게.”

그래, 이따 보자.”

유진은 그것이 윤지와 나눈 마지막 통화일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날 뉴스의 끝자락에는 주유소에 폭발사고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2명의 사망과 1명의 중상. 이제껏 유진의 인생에서 1이라는 숫자가 그때보다 크게 느껴지는 순간은 없었다.

윤지에게 일어난 불의의 사고는 그녀의 청력 80%를 앗아갔고, 보청기를 끼면 코앞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정도로밖에 청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 사고는 둘의 관계를 한순간에 어그러트렸고, 유진은 윤지를 볼 때마다 그 죄스러움의 감정을 떨쳐낼 수 없었다. 윤지는 그 사고로 오랫동안 바라던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포기했다. 병원에서의 6개월 이후에도 윤지는 잃어버린 삶의 동력을 쉽게 찾지 못한 채 유진의 집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윤지가 보는 채널에선 VAS에 대해 전문가들이 나와 토론하고 있었다. 그중 한 문화평론가는 VAS가 젠더 갈등을 해결할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VAS는 우리 사회의 극심한 젠더 갈등을 봉합할 수 있을 겁니다. 다른 성별이라는 이유만으로 혐오 현상이 만연한 한국에서 이 음성 기술은 자신의 성별을 숨길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안입니다

X, 개소리하고 있네. 저 기술이 어떻게 젠더 갈등을 봉합해? 어이가 없네. 이제 성별까지 숨기게 되면, 우리들은 평생 숨어 살아야 하나?” 윤지가 거칠게 소리쳤다.

“.......” 유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저거 절대 안 써. 저걸로 보정 받은 건 진짜 내 목소리가 아니야.” 윤지는 계속 말했다.

오늘 청장모 모임에 다녀왔거든. 그 사람들 VAS를 쓰더라? 그게 청각 장애인들 발음 어눌한 거에 도움을 주나 봐.”

윤지가 요즘 일주일에 한 번 나가고 있는 청장모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모임의 약자로, 청각장애인들이 함께 모여 소통을 하는 모임이었다. 청력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인 만큼 주로 수화나 필담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과 나눴지만, 오늘 모임 참가자들은 모두 구화를 할 줄 아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그랬니?” 유진은 윤지의 귀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 오늘 나온 사람들은 다 구화를 할 줄 알더라고. 근데 이제 다시는 안 갈 생각이야.”

?”

그냥, VAS로 유창하게 이야기하는 걸 못 들어주겠더라고. 난 내 목소리가 기억이 안 나. 하이톤이었는지, 아니면 허스키한 저음이었는지.”

근데 난 내가 지금 어떤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지 모르고, 또 그게 이상할 수도 있지만, 내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싶어. 왜 바꿔야 하는 거야? 그게 비정상적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목소리 자체로서 자연스러운 거라고 생각해.” 윤지는 차분하지만, 또렷이 말하고 있었다.

유진은 윤지의 말에 납득했지만,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래 장애에 대한 윤지의 태도는 너무나 당연하니까.’ 그러나 윤지는 유진의 감당하고 있는 관계 부담의 몫에 관심이 없었다. ‘넌 내가 어떤 심정으로 회사에 나가는지 이해할까? 내가 이 관계를 지키기 위해 얼만 큼의 노력을 하는지도.’

넌 어땠는데, 회사는?” 윤지가 의례적인 톤으로 물어봤다.

유진은 윤지의 물음에 할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그것을 다시 속으로 삼키고 말았다.

그리고 아 그냥 무난했어.”라고 생기 없이 답했다.

유진은 그 모든 고통을 입 밖으로 꺼낼 여력이 없었다. 회사라는 공간에서 유진이 겪는 일들에 대해 윤지는 무관심했고 헤아릴 마음조차 없었으니까. 유진은 소파에 몸을 뉘었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2.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이 부장이 사내 메신저를 통해 유진을 자신의 자리로 불렀다. 이 부장은 그녀의 아버지와 회사 동기로 근무했던 사람이었다. 유진의 아버지가 임원 승진에 성공한 것과 달리, 그는 사내 정치는 능했지만, 고객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소문이 퍼지며 임원 승진에 실패했다. 그리고 6개월 전쯤, 그는 유진의 회사의 본부장으로 스카우트됐다. 입사 지원서의 가족란을 본 것인지 그는 유진에게 자주 말을 걸고 친한 척을 해와,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곤 했다.

유진 씨, VAS 도입한 후부터 너무 부진해, 원래 안 그러다 요즘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죄송합니다. 더 잘하겠습니다.”

유진 씨, 이제 일한 지 몇 년 정도 됐지?”

다음 달로 3년 됩니다.”

그렇군, 유진 씨, 자격증 땄다고 했지? 이제 슬슬 상담원 말고 설계사 해봐야 하지 않겠어?”

? 무슨 말씀이신가요?”

아니 들어온 지 벌써 3년이잖아, 이제 상담원이 아니라 직접 영업을 뛰어 성과도 내보고 그래야지. 내가 고 이사님 부탁도 있고 해서 자리를 좀 알아봤어. 이번 하반기 공채에 지원해봐.”

아버지가 부탁했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유진은 애써 흔들리는 동공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신경 써주셔 감사합니다.”

근데, 유진 씨는 자격증 말고 변변한 스펙이 없잖아. 명분이 필요해 명분이. 그래서 말인데 이 건 한 번 진행해봐.” 그 말을 하며 이 부장은 노란 봉투를 내밀었다.

내가 얼추 사전 작업해놓았으니, 전화해서 미팅 잡고 계약서에 도장만 받아오면 돼, 알겠지?” 이 부장이 서글서글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 제가 해도 되는 건가요? 아직 보험 영업에 대해 잘 모릅니다.”

아 유진 씨,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래. 그냥 가서 보험 소개하고, 말 좀 들어주고 그럼 되는 거잖아.”

.”

왜 이렇게 대답이 마뜩잖아. ‘콜센터 상담원 생활을 하면서 연결된 인맥으로 우리 회사 보험 영업에 기여했다.’ 이런 식의 스토리가 있어야 영업직이 되는 거야. 이 건 성공하면 그렇게 자기소개서에 쓸 수도 있는 거고 말이야.” 이 부장은 당연한 걸 묻는다는 식의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고 이사님은 잘 계시나?”

네 잘 계십니다.

그래, 내가 조만간 찾아뵙는다고 말씀 한번 드려

네 알겠습니다.”

그래 이제 가서 일 보라고.”

유진은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와 이 부장이 준 노란 파일에 담긴 서류를 살펴봤다. 서류에는 다름 아닌 VAS 시스템을 만든 A사 대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름: 최명청(崔鳴聽)
전화번호: 010-XXXX-XXXX
직업: 스타트업 A사 대표
가족: 배우자 한OO, 자녀 1
학력: XX고등학교 졸업, OO대학교 졸업

기타사항: 해외 유학 후 귀국해 스타트업에 뛰어듦. VAS 개발에 성공해 주목받는 젊은 CEO로 주목받고 있음.
요구사항: 실비보험, 암보험, 상해보험, 입원 수술보험, 어린이 보험 등


유진은 최 씨의 프로필을 읽으며 그의 삶의 궤적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유진은 수화기를 들고 기재된 전화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연결음이 3번 정도 울린 후 네 여보세요.’ 하는 VAS 모드를 적용한 음성 변조 목소리가 들렸다.

유명인은 목소리 역시 프라이버시구나. 하고 유진은 생각했다.

안녕하십니까, OO보험에서 연락드렸습니다. 최명청 대표님 맞으십니까?

네 맞습니다. 보험이라고 하셨죠? 근데 조금만 이따 전화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은 통화하기가 좀 곤란합니다. 이따 전화 드리겠습니다. .......”

갑작스러운 통화 종료에 유진은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그녀는 통화가 끝나기 전 수화기 너머로 들린 정체 모를 목소리를 확실히 느꼈다. 성별을 알긴 어려웠지만,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한편, 유진은 커피를 마시기 위해 탕비실로 향하며 최 대표의 변조된 목소리를 떠올렸다. 상담원 생활을 하며 유진은 참 많은 진상 고객들을 겪었다. 상담원을 처음 시작했을 때 유진 역시 자신의 인격이 존중받길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자 상담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차별한 욕설과 폭언을 퍼붓는 이들과 통화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아이스크림 통에 들어있는 드라이아이스처럼 공중으로 산산이 흩날려지는 느낌을 받았다. VAS 기술을 통해 자신의 성별을 숨길 수 있게 되며, 진상 고객의 차별적 발언을 듣는 횟수는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고객이라는 갑의 지위를 마음껏 활용하는 이들은 많았다.

그러나 방금 최 대표처럼 수신하면서도 VAS 모드를 사용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이들과의 통화와 달리 최 대표와의 짧은 대화는 온통 숨김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VAS로 서로를 숨기는 것, 유진은 이것이 상대방을 향한 예의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탕비실에서 유진은 가벼운 손놀림으로 커피믹스의 원두를 종이컵에 붓고 따뜻한 물을 담았다. 원두가 눈 녹듯 물속으로 사라져가는 모습을 보며, 유진은 기도했다. 이 커피믹스의 원두처럼 자신 앞에 산적해 있는 문제가 해결됐으면 하는 막연한 소망. 유진은 그런 상상이 자신의 활력을 갉아먹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놓을 수 없었다. 이 현실에서 탈출할 수 있는 상상, 그 자그마한 시간이 유진에겐 무엇보다 소중했으니까.

자리로 돌아와 앉자마자, 휴대폰 전화벨이 울렸다. 최 대표였다. 유진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전화를 받았다.

네 안녕하세요. OO보험 고유진입니다.”

네 최명청입니다. 아깐 죄송했습니다. 이 부장님한테 어느 정도 설명은 들었고, 자세한 것은 만나서 이야기하시죠.”

최 대표의 빠른 정리에 유진은 짐짓 놀랐지만, 당황하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최 대표는 위치를 문자로 보내겠다고 말하며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최 대표와의 통화가 긴장감을 채 느끼기도 전에 끝나버리자, 유진은 뭔가 할 일을 마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유진은 한편으론 저런 짧은 통화가 편했다. 고객 중에서는 유진을 한참 동안 떠들게 하면서, ‘네 잘 들었습니다.’ 한마디 말로 전화를 끊는 이도 있었다. 물론 그것이 유진의 일이었지만 그런 전화를 마치고 나면, 허탈함이 드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최 대표와의 간결한 통화는 당황스러우면서 반가운 일이었다.

유진은 의자를 뒤로 젖히고 기지개를 켰다. 그러자 하품이 자연스레 나왔고 유진은 미처 손으로 그것을 가리지 못했다.

다시 자리에 앉으려는 유진 앞에 이 팀장이 있었다.

유진 씨, 피곤한가 보네. 내가 말한 일은 다 한 거겠지?”

.” 유진은 짧게 대답했다.

뭐라고 하던?”

오늘 만나자고 하던데요. 장소는 문자 주기로 했고요.” 유진이 대답했다.

그래? 그럼 이따 나가기 내 자리에서 보험 책자들 좀 가져가서 다른 상품도 설명해 드리고.” 이 부장이 웃음을 띤 채 말했다.

.”

아 유진 씨 그리고 이번 건 이름은 내 걸로 올라가는 거 알지? 그 상담원이 보험 가입시켰다는 거 설명하기도 번거롭고, 뭔지 알지? 그러니까 오늘 가서 일만 제대로 처리해줘 알겠지?” 이 부장이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표정과 말투. 그녀를 향해 온갖 비언어적, 반언어적 시그널을 날리는 저 사람에게 과연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유진은 혼란스러웠다.

3. 유진은 지하철을 타고 A사가 위치한 도시로 향했다. ‘글로벌 융복합 RD 허브라는 표지판이 스쳐 지나갔다. 지하철에서 그녀는 최 대표의 진짜 목소리를 상상했다.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일지 아니면 깔끔한 비즈니스맨 같은 육성일지, 호기심이 머릿속을 맴도는 기분이었다.

최 대표가 일러준 장소는 회사 건물 1층에 아래 위치한 사내 카페였다. 지하철역에서 15분쯤 걷자 회사의 건물이 보였다. ‘VAS.’ 맑은 고딕체의 폰트에 붉은 글씨, 그리고 녹색 꽃 모양의 마크가 쓰인 간판이 건물 꼭대기에 붙어 있었다.

참 어울리지 않는군.’ 유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카페에 들어가 유진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이제 어느덧 계절은 가을의 마지막을 지나고 있었다. 날씨는 갈수록 쌀쌀해졌고, 그땐 몸을 녹일 수 있는 음료가 필요하니까. 약속 시각인 6시를 훌쩍 지나 630분이 되도록 최 대표는 카페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유진은 점점 초조해지고 한편으론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약속에 늦는 것이 사업가가 가질 수 있는 태도인가.’ 불만 어린 생각이 그녀를 가득 채웠다.

그 순간 카페 문이 열리며 여러 사람이 들어왔다. 그중 파란색 운동복 상의와 대비되는 검은색 정장 바지 차림을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그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다 유진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유진에게 다가와 앞에 놓인 여러 서류를 유심히 보더니,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VAS 대표 최명청입니다.” 남자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직접 대면으로 계약을 하는 건 오랜만이라서요. 회사 회의 마치고 준비 좀 하고 오느라 30분이나 늦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유진은 남자의 사과에 괜찮다고 대답했지만, 그의 목소리에 짐짓 놀랐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소리였다. 마치 여성과 남성의 목소리 가운데 즈음 있는 듯한, 하지만 그것은 호감형이 아니라 기괴한 쪽에 가까웠다. 그녀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유튜브에서 본 마지막 카스트라토영상 속 목소리가 떠올랐다.

남자는 순간 유진의 얼굴 변화를 감지했는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목소리에 좀 놀라셨죠? 다들 그런 표정을 짓더라고요. 어렸을 때 목을 좀 다쳤습니다. 그 이후로 목소리가 이렇게 됐죠. 그건 그렇고, 바로 진행해 주시죠.”

유진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마음에 유진은 애써 가지고 온 팸플릿을 펼치며 준비해온 보험의 종류를 본격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미리 말씀 주신 OOOO은 정말 잘 나온 상품이에요. 근데 최근 저희가 출시한 OO상품도......”

대표는 유진의 설명이 시작되고 줄곧 집중하는 자세를 유지했지만, 점차 말이 길어지자 조금씩 힘들어하는 기색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유진은 보험 약관에 대해 설명을 하면서도, 사장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그의 표정에서 오늘 계약 여부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얼굴을 관찰하던 유진의 얼굴에서 땀 한 방울이 매끄러운 카페의 바닥으로 떨어졌다.

, 저의 설명은 여기까집니다. 혹시 더 궁금한 사항이 있으신가요?” 유진은 조심스레 대답했다.

유진 씨라고 했나요? 혹시 저녁 하셨나요?” 한참을 침묵으로 일관하던 그가 아직도 적응하기 어려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아직입니다.” 유진은 나지막이 대답했다.

나머지 이야기는 먹으면서 듣는 건 어떨까요? 저도 저녁이 아직이고, 얘기는 더 들어봐야 할 것 같아서요.”

유진은 설계사가 식사까지 고객과 함께해야 하나 싶었지만, 첫 고객과의 계약을 망쳐버리고 싶진 않았다. 그가 데리고 간 곳은 그의 회사 근처 삼겹살집이었다. 그의 메뉴 선정에 유진은 또 한 번 의구심이 들었지만,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긴 어려웠다.

술 한 잔 드리겠습니다.” 고기를 자르는 유진의 잔에 그는 소주를 따랐다.

감사합니다. 제가 따라 드릴게요.” 유진은 그에게 술을 따르려 했지만, 그는 손사래를 치며 자신의 잔에 직접 술을 따랐다.

이제 드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녀는 고기를 자르던 가위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둘은 한참을 말없이 먹고, 마셨다. 빈 병이 쌓여가고, 점점 취기가 오른다는 생각이 들 무렵, 유진은 대표에게 말을 건넸다.

최명청 대표님. ...... 계약은 어떻게?”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 씨 하하하. 그런데요 유진 씨, 제가 어쩌다 VAS를 만들게 됐는지 알려드릴까요?” 유진은 그다지 궁금하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최 대표는 이어서 대답했다.

제 와이프가요, 가수였어요. OO이라고. 인디 씬에서는 제법 유명했다고 하더라고요.”

OO. 인디 음악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이름이었다. ‘2의 자우림이라 불리는 그룹의 보컬을 담당한 한OO8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향수 어린 목소리로 인디 씬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 몇 년 동안 새로운 앨범에 대한 소식이 들려오지 않자, 그들을 향한 팬들도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유튜브 속 공연 영상에서는 팀 불화로 인한 그룹 해체일 거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곤 했다.

제가 아내한테 반한 이유도 목소리였거든요. 이상한 목소리를 가진, 무일푼에 불과했던 제가 그 목소리 하나에 빠져 들이댔죠. 다른 모든 것은 흘러가도 그건 변하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대표가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그때, 아내가 후두암 진단을 받았죠. 아내가 다시 노래하게 해주고 싶었어요.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으면, 라이브는 무리더라도 앨범은 낼 수 있을 테니까. 모든 노력을 다했어요. 그래서 막상 프로그램은 개발됐는데, 아내 암이 전이됐죠. 후두암으로는 예외적인 경우라던데. 이제 노래하기는 어려워졌어요.”

유진은 최 대표의 말을 가만히 들으며, 점점 그와 눈을 마주치기 어려워진다는 것을 느꼈다.

보험에 가입하려는 것도 아내의 부탁 때문이에요. 아내는 우리 딸, 혼자되면 어쩌지 항상 걱정해요. 아내는 아직 VAS에 대해 모르거든요. 아내가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가고 나서야 VAS가 알려지기 시작했으니까. 그래서 보험 들라고 계약서 가져오라고, 매일 성화예요. 이번 주까지는 검사 맡아야 하는데.” 대표는 울먹임과 동시에 미소 지었다.

유진은 침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소주 때문인지, 속 깊은 이야기를 들은 탓인지 입안이 매우 텁텁했다. 대표의 넋두리를 들으며 그녀는 윤지를 떠올렸다. 윤지가 다친 이후로 자신 역시 그런 삶을 살아왔으니까. 윤지와 내가 그런 헌신의 관계를 이어갈 수 있을까. 유진은 머릿속을 잠식해나가는 이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어색한 침묵의 공기가 흐르고, 최 대표가 불쑥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유진은 계산을 황급히 하고, 그를 쫓아 뛰어갔다.

밤의 대기는 수분을 머금었는지 유진은 그 밀도를 감당하기 버거웠다. 저 사람은 대체 어디로 가는 건가. 그녀는 가로등 아래서 생긴 대표의 그림자를 무작정 밟아가기 시작했다.

최 대표는 다리를 향해 비척비척 걸어갔다. 다리의 한 가운데쯤 오자, 그는 멈춰선 후 난간 아래 있는 작은 하천을 보며 유진에게 말을 걸었다.

유진 씨, 이 하천 이름이 뭔지 알아요? 금토천이에요. 쇠 금()에 흙 토() 자 써서. 근데 이게 점점 갈수(渴水)가 돼서 가만 놔두면 아예 하천이 없어진다더라고. 시에서 재빨리 예산 투입했지, ‘갈수 안 되게 막아라하고 말이야. 그래서 지금은 아주 잘 흘러요.” 대표는 풀썩 주저앉아 이야기했다.

가끔 여길 와서, 저 하천 소리를 들어요. 아내 목소리도 VAS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이니까요. 그냥, 아무 생각 안 나게 해주니까. 그러다가도 가끔, 아주 가끔은 저 실개천의 줄기가 너무 외로워 보여요.”

저 흐르는 물소리가 그에겐 아내의 목소리로 들리는 걸까. 유진은 그 생각에 마음이 너무 아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천류(川流)에 한가득 달이 흘렀다.

4. 귓가에 아릴 듯이 날카로운 알람 데시벨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벌컥 눈을 뜬 유진은 휴대폰부터 찾았다.

815분이었다. 미칠 듯이 준비한다면, 간신히 도착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오늘은 무기력하게만 느껴졌다. 침대에서 일어나기 싫다고 생각했다. 저 침대 시트가 나를 모래 함정처럼 삼켜주길. 그래서 서서히 시트 속으로 파묻혀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유진은 눈을 감고 각성의 시간을 잠시 미뤘다.

아무도 자신을 찾을 수 없는 공간으로 사라지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을 때, 5분마다 다시 울리는 저 알람은 지겹지도 않은지 유진을 다시 현실로 이끌어냈다. 눈을 비비며 일어난 유진은 샤워실로 향하며, 어제 일을 떠올렸다. 택시를 잡아 최 대표를 보내고, 자신도 택시를 잡아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2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가기 전, 유진은 소파에 누워 잠든 윤지 앞에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보며, 왠지 모르게 유진의 가슴이 뭉근한 기운이 올라왔다. 머리칼을 넘겨주며, 유진은 그녀의 해사한 얼굴을 눈에 담았다.

어김없이 전철에 오르며, 유진은 휴대폰에 와있는 문자를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로 세 통이 와있었다. 한 통은 온라인 쇼핑몰 광고였고, 그다음으로 온 것이 최 대표로부터의 문자였다.

안녕하세요 고유진 설계사님. 어제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술을 먹고 제가 실수한 게 있더라도 너그러이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어제 말씀해주신 보험 계약 건, 좀 더 고민해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좀 더 따져봐야 할 지점이 있어서요. 좋은 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

어제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건지, 그렇게 속을 쉽게 내보일 수 있는 건가. 최 대표에게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알겠다는 답장을 짧게 보낸 후, 유진은 어제 그와 나눴던 대화를 잊어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세 번째 문자를 확인했을 때 유진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아버지다. 김 부장한테 말한 것은 전해 들었겠지? 이제 너 할 만큼 했다. 이번 설에는 집 오거라. 문자 보면, 바로 전화하고.

전화번호는 어디서 얻었는지, 아버지는 이따금 문자를 보내오곤 했다. 이미 집을 떠난 3년이나 된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이 정도로 초연할 수 있을까. 유진은 항상 놀라곤 했다. 아마 아버지 성격으로 김 부장에게 자신의 일자리를 청탁하긴 무척 어려웠을 거다. 남에게 굽히는 걸 너무도 싫어했으니까.

가정에서도 그런 성격은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무슨 일이 있을 때면, 늘 유진과 어머니에게 잘못을 빌라고 다그쳤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유진의 내면 안에 있는 감정의 골은 깊어지기만 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땐 그나마 어머니가 그녀의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 주었지만, 중학교 3학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선 누구도 유진을 위로해주지 못했다. 윤지를 만나기 전까진.

지하철은 어느덧, 다시 한강에 다다르고 있었다. 창에 비친 날씨는 메시지를 본 후 유진처럼 잔뜩 우중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번 역은 OO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아직 두 정거장이나 남았지만, 유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리기로 마음먹었다. 물이 흐르는, 물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가기로. 열차에서 내리자 온 전광판에 VAS의 광고가 가득했다. 정식 출시를 겨냥한 광고인 듯했다.

당신의 소리, 이젠 우리가 바꾸겠습니다.”

VAS의 광고를 보자, 잊기로 했던 최 대표의 말이 자꾸 온몸에 맴돌았다. 유진은 한강이 보이는 출구로 향했다. 계단을 하나씩 오르며, 앞에 펼쳐질 풍경을 기대했다. 마지막 계단에 올랐을 때, 한강이 눈앞에 있었다. 비가 올 것만 같은 날의 한강 둔치는 묘사하기 어렵게 살풍경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유진은 한강의 흐르는 물을 바라봤다. 느리지만 확실히 그리고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아마도 김 부장이겠지.’ 그녀는 전화벨을 무음으로 바꿨다.

유진은 그녀를 둘러싼 모든 문제를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크게 숨을 쉬자, 입김이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눈을 감고, 청각에 온통 신경을 집중했다.

흐르는 강물 소리가 아득히 들려오는 듯했다. 윤지의 목소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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