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너무 사랑한 남자
음악을 너무 사랑한 남자
  • 박용진 기자
  • 승인 2019.11.24
  • 호수 1504
  • 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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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식 <국립오페라단>단장 및 예술감독

“그냥 노래 부르는 게 너무 좋아서.” 바로 박형식 동문이 성악을 하게 된 계기다. 이처럼 누구보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 박 동문은 본교 성악과 출신이다. 이유 없이 음악이 좋다고 말하는 그는 20년 동안 성악가로 활동 했고 이후 전문 경영인의 자리에서 예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 국립오페라단 예술감독을 맡게 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던 소년
어린 시절 박 동문은 소극적이고 남들 앞에 나서기를 망설였다. 하지만 교회에서 독창을 할 때, 소풍가서 친구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때만큼은 자신감이 넘쳤다. “지금도 소극적인데, 노래할 때만큼은 신기하게도 자신감이 넘쳤어요.” 

그에게 자신의 학창 시절을 표현해 달라고 부탁을 하자 박 동문은 ‘모범생’이라고 답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공대 진학을 목표로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다. 그러던 그에게 고등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는 겨울방학은 그의 인생의 변곡점이 됐다. “갑자기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노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를 계기로 부모님을 설득하기 시작했지만 갑자기 음대에 진학하겠다는 아들의 말에 부모님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평소 공부도 잘하던 아이가 갑자기 음대를 간다고하니 부모님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지만 결국 그는 부모님의 마음을 돌렸고 우리 학교 성악과에 진학한다.

그렇게 입학한 성악과에서 그는 연습실 자리를 놓치지 않으려 도시락을 싸 들고 다니는 연습벌레였다. 지금처럼 냉난방이 갖춰진 좋은 환경은 아니었지만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그는 연습실을 떠나지 않았다. 그만큼 노래를 부르는 게 좋았고 노래를 잘해야겠다는 생각 외에는 다른 생각은 없었다. “배호흡을 늘리기 위해서 단전호흡을 배워야 했는데, 단전호흡 배우려고 합기도 도장까지 찾아다닐 정도로 노래를 잘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죠.”

▲ 박 동문의 사무실에는 지금까지 그가 해온 공연 포스터들이 남아있다. 그 중에서도 사무실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수많은 오페라 공연 DVD들이다. 사진은 박 동문의 사무실 서재다.

성악으로 채워진 젊은 날의 기억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성악가 활동을 해오던 박 동문은 오페라의 본토 이탈리아로 유학을 간다. 많은 사람이 낯선 환경 때문에 타지 생활을 힘들어 하지만 박 동문은 달랐다. 이탈리아에 간 이유를 ‘오직 노래를 더 잘 부르기 위해서’라고 설명한 그는 이탈리아에서의 유학 생활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2년이라고 이야기했다. “‘어떻게 하면 노래를 더 잘할 수 있을까?’ 정말 그 생각뿐이었어요. 그래서인지 언어 공부를 하는 시간도 낭비라는 생각에 생활 언어만 가지고 2년을 살았어요.” 그런 그에게 학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학위와 언어 대신 현지에서  노래 배울 기회를 찾아다녔고, 현지에서 유명한 강사에게 레슨을 받을 수 있었다. 배움의 목마름으로 갔던 이탈리아 유학에서 그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오직 음악만을 바라보며 20년이 넘는 인생을 성악가로 살아온 박 동문. 그에게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공연은 어떤 공연일까? 바로 1974년 있었던 세종문화회관 개관 공연이었다. 세종문화회관 개관공연 무대에 서기 위해 합창 단원들이 오디션을 봤다. 대학을 갓 졸업한 박 동문은 수많은 경쟁자를 제치고 솔로 파트에 당당히 합격한다. “아직도 기억해요. 3895석의 관객석에 관객들이 꽉 들어차 있고, 뒤에 합창단에는 모두 내 선배들이 있는데 그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제가 솔로를 부르고 있다는 게 벅찼어요.” 이처럼 쟁쟁한 합창단원들을 대표했던 세종문화회관 개관 공연은 박 동문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남는 공연이었다.

무대를 벗어나 전문 경영인으로
현재 그는 전문 경영인의 위치에서 국립오페라단을 이끌고 있다. 지난달 국립오페라단 예술 감독으로 취임한 그에게 전문 경영인의 자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동안 정동 극장장,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단 사장 등 이전에도 전문 경영인의 자리에서 단체를 이끌었다. 성악가로 평생을 살아온 그가 어떻게 전문 경영인으로 거듭난 걸까? 박 동문은 “세종문화회관에서 성악가로 공연을 하며 공연 기획 일을 같이 맡았어요”라며 “이때 저를 공연 기획 일에 참여시켜주신 분들의 도움으로 전문 경영인으로까지 거듭날 수 있었던 것 같아요”라고 성악가에서 전문 경영인으로 거듭난 이유를 설명했다.

자신을 책임감이 많은 사람이라고 소개한 그는 전문 경영인이 된 후 책임감 때문에 잠을 못 이룬 적도 많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책임감이 큰 편인데, 제가 맡고 있는 일이 나랏일이다 보니 더욱더 책임감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어요. 그 책임감 때문에 잠 못 이룬 밤도 많고 꿈에서도 나올 정도예요”라고 말했다. 임기가 3년 남은 박 동문에게 재임 기간 중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는지 묻는 질문에 그는 “이전 단장이 잘 해왔지만 부족했던 부분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런 부족했던 부분을 채우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박 동문은 인터뷰 말미에 ‘화려하지는 않지만 필요하고 특별하지는 않지만 소중한 사람이 되자’를 자신의 가훈이라며 소개했다. 박 동문은 “항상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필요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인생을 살아오다 보니 복이 찾아왔다”며 “앞으로의 인생도 저 말을 새기고 살아갈 겁니다”라고 말했다.


공대를 목표로 하던 학생에서 성악가로, 다시 성악가에서 전문 경영인이 되기까지 그의 인생은 변화무쌍했다. 앞으로 그의 인생이 어떤 방향으로 바뀔지 그리고 그가 이끄는 국립오페라단은 앞으로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갈지 기대해 보자.
 

▲ “인생에 공짜는 없어요, 내가 얼마나 노력해서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나오는거지” 박 동문은 자신을 5글자로 표현해 달라는 말에 ‘공짜는 없다’며 자신이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도 노력의 결과라고 말했다.

사진 노승희 기자 seunghi0703@hanyang.ac.kr
도움: 정채은 수습기자 chaeun127@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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